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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포 Mar 10. 2021

"당신, 실연당한 사람 같아."

실연은 나와 무관한 단어다. 스무 살에 만난 남자친구와 결혼했으니까 한 번도 연인과 헤어져 본 경험이 없다. 그런데 이별 노래를 잔뜩 틀어놓고 사진과 편지를 보며 일주일에도 몇 번씩 질질 짜던 때가 있었다. 남편은 말했다. "당신, 실연당한 사람 같아."


정규직으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연봉을 낮춰서 계약직으로 들어간 회사가 있었다. 눈에 보이는 조건은 더 좋지 않았지만 하루를 일하더라도 신나고 재미있게 일하자는 마음으로 지원했다. 그리고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줄어든 연봉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꿈같은 회사였다.


팀에서는 입사 당일 '우리에게 와줘서 고맙다'며 깜짝 환영 파티를 해줬다. 입사 며칠 동안 좋아 보이는 허니문 기간이 끝난 후에도, 23개월 내내 행복했다. 팀원들은 나를 믿어주고, 문제가 있으면 함께 화를 내주고 달려들어서 해결해주었다. 팀장님은 든든한 울타리였다. 내가 마음껏 시도해 볼 수 있게 해 주면서 동시에 어려운 일들을 척척 해결해줬다. 성과도 좋았고, 나름 인정도 받았다.


그리고 22개월이 되던 때 팀장님은 내 앞에서 엉엉 울었다. TO가 없어서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미안하다고. 자기가 힘이 없다고. 당연히 정규직이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동료들도 적잖이 충격이었는지 한동안 팀 분위기가 침울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사랑스러운 사람들이었다. 퇴사하는 날, 송별회에서 우리 팀 말고도 각 층에서 나와 함께 업무 했던 수십여 명이 모여 울고 웃었다.


‘회사가 거기밖에 없냐’라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지금은 다른 곳에서 더 재미있게 일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2년간 짝사랑하던 사람에게 고백했더니 뻥 차인 기분이었다. 평소 같으면 사무실에 앉아있을 시간에 여행도 가고, 책도 읽으며 여유를 만끽하는 척했지만 마음 한 곳이 허했다. 함께 웃고 이야기하고 일하던 시간이 그리웠다. 그럴 때마다 동료들이 만들어준 포토북, 빼곡히 써준 수십 통의 편지를 몇 번씩 들여다봤다.


남편은 돈은 자기가 벌 테니 공부를 더 해봐도 좋고, 좀 쉬어도 좋다고, 나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했지만 회사는 나에게 생계 수단으로써만 존재하지 않았다. 치열하게 머리를 맞대고 때론 얼굴을 붉히기도 했지만 내 몫이 있었고 보람이 있었다. 무엇보다 내 편이 있었다. 좋은 동료, 좋은 상사, 좋은 분위기, 좋은 일이 있는 회사가 실재한단 말인가? 있다. 있었다. 아마 내 인생에 다시없을 호시절이리라.


회사를 사랑한다는 건 퇴사가 유행이고, 사이드 프로젝트가 필수인 시대에 역행하는 거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잘했는데도 소위 말해 ‘팽 당한 거’ 아니냐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좋은 사람 사랑했었다면 헤어져도 슬픈 게 아니’라는 어느 노래 가사처럼 내가 회사를 사랑한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지금의 회사도 사랑하고 싶다. 출퇴근과 점심시간을 합쳐 하루에 최소 10시간. 잠자는 시간을 빼고 가장 오래 머무르고 가족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곳을 괴로움이나 분노, 미움만으로 채우고 싶지 않다.


회사뿐만 아니라 내가 속한 모든 곳에서 모든 시간을 연인처럼 대하고 싶다. 에너지를 많이 들여야 하고, 기대와 다를 때 실망하고, 하루에도 몇번씩 냉탕과 온탕을 오가겠지만, 인생의 페이지를 충실하게 그려내고 싶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다시 실연당한 사람처럼 눈물을 훔치더라도 사랑했던 힘으로 또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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