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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포 Apr 28. 2019

취준생의 벚꽃 놀이

내년 봄에는 벚꽃놀이를 할 수 있을까?

4월은 어김없이 벚꽃의 계절이다. 찬바람을 피해 땅만 보고 걷던 사람들의 움직임에도 여유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나도 사람들을 따라 느릿느릿 걷다가 아직 새순이 나지 않은 응달의 나무 아래 앉았다. 햇볕이 벚나무 가지 사이로 내리쬐는 맞은편 풍경을 보고 있자니 왜 이렇게 쓸쓸한지…. 한껏 멋을 낸 신입생들이 봄처럼 깔깔 웃으며 지나가는데 나 혼자 검은 코트를 걸치고 진눈깨비가 내리는 어두운 초겨울을 견디는 것 같다.
 
어쩌면 한낮에 벚꽃을 마음껏 볼 수 있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일지 모른다. 그런데도 아쉽기보단 괜히 싱숭생숭해서 이번 주 벚꽃놀이를 가자는 남자친구의 메시지에 답장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벚꽃놀이를 간 기억이 희미하다. 지나가면서 ‘와!’ 하고 감탄만 하는 게 몇 년째인지 모르겠다.
 
고등학생 때는 입시 준비에 벚꽃놀이는 꿈도 못 꿨다. 대학만 가면 다를 줄 알았는데 유독 벚꽃 필 때가 되면 중간고사에 과제가 겹친다. 그리고 몇 학점 안 들어 한가할 것 같은 대학 4학년의 4월은 취업 준비가 본격적으로 꽃피는 공채의 계절이다. 그러니까 꽃이 있어도 마음으로 ‘놀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내일까지 서류 전형 마감인 곳이 하나, 그다음 주까지 마감인 곳이 둘이다. 당장 자기소개서를 써야 하니 벚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게 당연하다. 자기소개서도 벚꽃놀이처럼 ‘자기’는 있지만 ‘소개’가 어렵다. 스물다섯 인생에서 실패를 극복한 감동 스토리라든가 대단히 성공한 일이 뭐가 있을까? 기억을 샅샅이 뒤져봐도 만족할 만한 사건은 없다.
 
자기소개서 모범답안이 있다는 건 정말 나를 소개하라는 게 아니라 그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걸 말한다. 결국, 나를 잡아 늘리고 재단해서 자기소개서를 쓴다. 타인의 기준에 내가 적합한가를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은 늘 의기소침함과 자괴감을 동반한다.
 
내년 봄에는 벚꽃놀이를 할 수 있을까? 수능을 준비할 때는 적어도 몇 해의 ‘봄’만 지나면 진짜 봄을 만끽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이라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취업 준비의 시간이 어디쯤에서 끝날지 몰라 다음 봄을 장담할 수가 없다. 입사 지원을 할 때마다 마치 무인도에서 SOS 신호를 보내며 구조를 기다리는 기분이다. 나의 쓸모에 관한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내가 지원하는 회사가 나의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나는 계속 겨울의 무인도에 갇혀 봄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언니, 요즘 뭐 해요? 얼굴 보기 힘드네요. 동방에 자주 놀러 오세요.” 며칠 전, 동아리 후배의 인사에 마음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얘가 뭘 모르네. 너 같으면 지금 동아리 방 가게 생겼냐? 너도 취준해봐라.’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다행히 오랜 시간 키워온 사회성이 제 기능을 해주어 겨우 웃으며 안부 인사를 얼버무렸다.
 
평범한 대화에도 마음이 날카로워지는 이유는 모든 질문이 ‘취업은 어때?’로 들리기 때문이다. 이쯤 되니 나의 벚꽃놀이를 방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공채의 높은 벽 때문일까, 취준생을 바라보는 시선 때문일까, 아니면 이런 시선에 갇혀버린 나 때문일까?
 
맞은편 벚꽃에서 시선을 돌려 내 등 뒤, 꽃도 잎도 나지 않은 나무를 본다. 어쩌면 이 나무도 벚나무일지 모른다. 꽃을 피우는 한철 열흘의 아름다운 시간을 빼면 나무들은 대개 파란 잎으로, 때로는 앙상한 가지로 서 있다. 어떤 꽃을 피우는 나무인지 사람들이 잊어버릴 정도로 긴 날들이다.
 
아직 자기의 봄을 맞이하지 못한 이 나무처럼 나에게도 언제 끝날지 모를 겨울이 앞에 놓여있다. 당장 나를 알아봐주지 않더라도 언젠가 때가 올 거라고 끊임없이 되뇌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언젠가는 찬란한 벚꽃을 피우겠지. 이번 주에는 비장한 마음으로 함박눈처럼 내리는 벚꽃을 보러 가야겠다.


대학내일 20’s voice​에 실렸습니다.

대학생 때 쓴 글을 조금 다듬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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