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10여 년 전. 전쟁 같은 일주일을 마치고 느지막이 눈을 뜬 어느 5월의 토요일 아침이었다. 휴일근무도 없고 약속도 없는 정말 프리한 주말 아침. 느긋함의 행복함을 느끼며 창밖을 보니 정말 날씨가 좋았다. 하늘이 진짜 하. 늘. 색이었다.
그런데 파란 하늘이 나에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이런 날 집에 있겠다고? 증말?’
어쩌지? 어디 갈까? 비행기를 탈까? 비행기표가 있을까? 누구랑 가지? 이렇게 갑자기 같이 갈 수 있는 사람이 있겠어?
두세 시간 후 나는 김포공항에서 제주도행 비행기에 오르고 있었다. 혼자였다.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다. 일단 비행기표를 구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다 썼다. 그 다음 일정은 이제부터.... 두렵다. 그래도 떠났으니 기쁘다.
몇 번 걸어보았던 올레길을 걷기로 했다. 혼자 걸어도 괜찮고, 아니 혼자가 더 좋은 것이 걷는 일이다. 공항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저질체력으로 매번 난이도 하 등급의 올레길만 걸었는데 이제 조금은 용기를 내어보기로 했다. 게다가 이렇게 죽이는 날씨이니 바닷가를 걸어보고 싶었다.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니 그냥 터미널 매표소에서 쭈볐거리며 말했다. “바닷가 올레길을 걷고 싶은데요”. 매표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표 한 장을 내밀었다.
버스로 한 시간쯤을 달려 도착한 곳은 아주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올레길 시작 지점으로 가면 좀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올레길 시작 지점은 정류장에서 한참을 걸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게다가 걸을수록 더욱 적막하다.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바다에 가까워지며 지나가는 사람조차 찾기 어려운 풍경이 펼쳐진다. 이걸 어쩌지. 다시 터미널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며 다리가 무거워질 무렵... 거짓말처럼 바닷가의 멋진 게스트하우스가 나타났다.
그 이름도 멋진 조이풀 게스트하우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늦은 오후, 예약도 없이, 차도 없이 걸어서 나타난 손님을 보고 오히려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이 놀랐다.
“어떻게 왔어요?”
“네?.... 날이 너무 좋아서요...”
한적한 바닷가의 텅텅 빈 게스트하우스에서 좋은 방도 골라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다음 문제는 저녁을 어떻게 먹느냐였다. 홀로 여행은 뭐든지 혼자 고민하고, 혼자 결정해야 한다. 저녁은 좀 잘 먹고 싶었다. 점심도 대충 때웠고, 불과 아침만 하더라도 아무 계획 없이 집에서 눈곱을 떼던 처지였는데 이렇게 근사한 제주도 바닷가에서 회 한 접시에 한라산 소주 한잔 정도는 들이켜줘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하니 또 혼자 나섰다. 그러나 허허벌판 게스트하우스 근처에 식당도 거의 없었고, 여자 혼자서 회 먹으러 들어가기엔 아직 좀 덜 뻔뻔했다. 또 한 시간쯤, 동네 구경이라고 생각하고 돌아다녔으나 마땅한 곳이 없었다. 결국은 그래도 좀 비싸 보이는 그럴듯한 횟집을 용기 내어 들어갔다. 그러나 회를 시키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웠다. 지금이라면 그냥 시켰을 텐데, 그때는 아직은 아가씨의 티를 벗지 못하였던지라.
결국은 1인분 주문이 되는 정식을 시켰다. 그래도 제주도인데 이것저것 반찬을 주겠지, 기대하며. 그리고 용기 내어 한라산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아침부터 기다리던 제주도에서의 소주 한잔. 아무도 내가 여기 있는지 모르는 곳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들이킨 소주 한잔. 사실 맛있는 지도 잘 몰랐을 거다. 엄청 떨었을 테니까 말이다.
한 잔을 들이켜자 그래도 마음이 뿌듯했다.
그래, 해냈어. 할 수 있어. 혼자서 여행. 혼술. 혼밥.'
그리고 또 한 잔을 따라 기분 좋게 마셨다.
그때였다.
“잠깐 앉아도 될까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
고개를 들어보니 웬 남자가 앞자리에 서있다. 아주 젊지는 않지만 그래도 젊은 남자다.
“저 여기서 일하는데요 한잔 사도 될까요?‘
그 횟집의 주방장이란다.
바다도 있고, 술도 있는데 하나가 없었잖아. 같이 마실 사람.
‘끄덕끄덕’
인상이 서글서글했다.
“여행 오셨어요?”
‘끄덕끄덕’
아무래도 경계심이 있는지라 말은 그저 남자가 했다. 제주도 사람은 아닌데 제주도에 잠시 살러 온 노마드족.
“뭐 좋아하시는 거 있어요?”
“사실 회를 좋아하는데, 혼자서 시키기 좀 그래서 못 시켰어요”
“그래요? 진작 말을 하시지. (주방을 향해) 여기 00, 00 좀 가져와”
잠시 후 우리 테이블에는 많은 양은 아니지만 신선해 보이는 다양한 회와 해산물 한 접시가 놓였다. 아, 너무 맛있다.
어느새 내가 시킨 소주 한 병은 바닥이 났다.
“제가 한병 살게요” 그 남자가 말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 사람이 자기 나이를 말했다. 그리고 나의 나이도 그 비슷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었다. (당시 몸무게 관리가 그런데로 잘 되어있는 편이었고, 흰머리도 없었고, 청자켓도 입고 있었고..어쨋든 한참 어려보였다 ㅎ)
알딸딸하게 술이 올라오고, 술병은 바닥이 났다. 때마침 주방에서 주방장을 호출했다.
나는 일어서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비척비척 숙소로 향해 걷고 있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였다.
그가 뛰어오느라 숨이 찬 목소리로 말했다.
“소주 한 병은 제가 산다고 했잖아요”
그의 손에는 소주값 천원짜리 몇 장이 들려있었다.
그리고....
영화에서 보면 그런 남자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곤 한다던데.... 그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고 돌아서서, 혼자보낸 밤은 길고 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