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오게 된 제주도. 낯선 인연과의 만남은 꿈이었던가. 아쉽고 뒤숭숭했던 밤을 뒤로하고 아침에 눈을 떴다. 역시 오늘도 죽여주는 5월의 쾌청한 날씨다. 기분이 다시 좋아진다.
오늘은 혼자 걷기로 한 날이다. 하루 종일 걸으려면 아침을 잘 먹어두어야 했다. 아침 식사가 가능한 식당은 어제 이미 검색해두었다. 제주도식 돼지불백이 나오는 식당이다. 어제의 음주와 뒤숭숭했던 잠자리로 입은 좀 깔깔했으나 열심히 먹고 길을 나섰다.
제주 올레길이 한참 인기 있던 시기라서 몇 번의 걷기 경험이 있긴 하나, 이렇게 아침부터 작정하고 한 코스를 제대로 혼자 걷기로 한 것은 처음이다. 게다가 준비 없이 나선 길이라 여행가방을 통째로 짊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어쩌랴.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지. 아님 너무 힘들면 중간에 그만 두면 되지. 무리할 것도 없다. 어차피 혼자인데 마음대로 하면 된다.
게스트하우스 옆으로 어젯밤 혼자서 맥주를 마신 바닷가 길로 들어섰다. 시작부터 난코스다. 바닷가의 돌덩어리들을 지나가야 한다. 돌은 미끄럽고, 아직 잠에서 덜 깨어난 몸이 삐그덕거린다. 마침내 돌 덩어리들을 벗어나니 바다를 따라 끊임없이 걷는 길이 시작되었다. 아, 멋지구나.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그 길을 걷는 것이 그리 낭만적이더니, 쉽지 않다. 모래사장에 발이 푹푹 빠지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발목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일 밖에 할 수 없는 것이 '길'이니 묵묵히 걸을 수밖에.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많이 나타난다. 올레길 사이사이 관광지만 체험하러 온 사람들이다. 한참을 가파른 산길을 올라간다. 가방을 멘 어깨가 아프고 초여름 날씨는 금세 무더워져 땀이 흐른다. 어느새 겉옷은 벗어서 가방 속에 넣고 걷는다. '걷기'가 좋은 것은, 걷다 보면 어느새 머릿속이 맑아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 생각, 저 생각이 마무 마구 떠오르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그리고 '진짜' 생각들만 남는다. 그것들은 그리 힘들지 않게 자유롭게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한다.
얼마나 걸었을까. 휴대폰 사진기로 이것저것 찍고 있는데 어떤 남자분이 말을 건다. 60대로 보인다. 그분은 아주 멋져 보이는 카메라를 갖고 있었다.
"사진 찍으시나요?" 역시 사진에 관심 있으신 것 같다.
"아, 저는 그냥...." 사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사진이 취미인 그분의 카메라 자랑을 들어주면서 자연스럽게 같이 걷기 시작했다. 그분은 친구와 가족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왔는데 같이 하루 이틀 일정을 보내고, 오늘은 각자 일정이란다. 자기는 사진 찍기를 좋아해서 오늘 이 올레길을 걸으면서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아마도 혼자 걷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기업의 임원으로 퇴직을 준비하고 계신 그분은 사진과 와인이 취미라고 했다.
"나중에 퇴직하면 소믈리에가 되려고 해요"
"소... 뭐요?"
"와인 감별사요. 자격증도 땄어요" 묻지도 않은 자격증을 꺼내어 보여주신다.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은데, 자격증을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와인을 무척 좋아한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소주, 맥주, 막걸리 외의 술은 잘 몰랐고, 가끔 양주를 먹을 기회가 있었으나 맛있다고 느끼지는 못할 때였다. 그리고 와인은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마시는 술이라고 생각했었다. 와인에 대해서도 할 말이 별로 없어 그저 그런 대화를 나누며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다리도 아파오고 배꼽시계도 울리기 시작했다.
"점심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분이 물었다.
"아마 좀 가다 보면 적당한 식당이 있을 거예요" 나도 초행길인데 이 분까지 모시고 가다 보니 마음이 좀 불편했다. 어떡하지. 같이 먹어야 하나. 그래도 여행길 친구인데 버리고 갈 수는 없지 않나... 걱정하던 참에 제법 큰 관광지에 도착했다. 그 분과 나는 식당 하나를 찾아 들어가 고기국수를 시켰다. 그분은 목이 마르셨던지 맥주를 시켰고, 나도 한잔 받아 마셨다. 원래 저질체력인 나는 오래 걸을 때에는 술을 먹지 않는데 그래도 예의상. 어젯밤 횟집 주방장에 이어, 오늘도 또 낯선 인연과 술 한잔을 걸치고 있네. 아, 나 홀로 여행의 묘미가 이런 것인가. 인연의 기운이 강렬한 시기였던가 보다.
더치페이도 어색하고, 그분이 사겠다는 것을 계속 거절할 수가 없어 국수와 맥주를 잘 얻어먹고 우리는(?) 또 길을 나섰다. 본격적인 산으로 오르는 길이었는데 그분은 산이 힘들다고 우회로로 가셨고 나는 산길을 택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그분이 가신 코스를 택했고, 나는 다른 길을 택했는데 그것은 정말로 잘한 선택이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곳에서 느꼈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을 다른 곳에서 느껴보지 못했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듯한 나무와 풀과 꽃들이 5월의 푸르름을 마구 내뿜었다. 인간의 자취라고는 없이 원초적 생명력을 간직한 그곳에서는 몇 시간이라도 앉아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후 그곳을 여러 번 방문했는데, 생태계 보호를 위해 폐쇄되어 있어 다시 가보지 못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다 보니 문득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다. 인간의 소리나 자취를 느낀 지 한참이나 된 것 같았다. 이런 올레길에서 길을 잃으면 한참은 헤매야 한다. 서둘러 다시 걷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이게 웬일인가... 60대의 소믈리에 그분을 다시 만났다. 아! 어쩌란 말인가...
반갑기보다는 약간 짜증을 느꼈다. 혼자 걷기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었는데, 또 동행자가 생겨버리다니 말이다. 나의 대꾸가 조금 더 불성실해질 즈음. 큰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한 여자분이 나타났다. 소믈리에 아저씨는 반색을 하더니 새로운 여자분에게 카메라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그리곤 나의 곁을 떠나 카메라 여인에게 가버리셨다. 그분은 카메라와 와인에 대해 대화가 되지 않는 나를 버리게 되어 기쁜 것 같았다. 나도 물론 그 분과 헤어질 수 있어 기뻤으나 동시에 밀렸다는 좌절감도 몰려왔다. 그러나 마치 그런 마음은 전혀 없다는 듯이, 발걸음을 빨리했다. 이제는 또다시 만나면 안 되므로.... 그리고 다른 인연을 만나야 하므로.
깊은 오후가 되어가면서 점점 더 다리는 아파오고 어깨에 맨 가방이 무거워 걸음이 느려졌다. 젊은 남자 여행자들이 그런 나를 휙휙 앞질러갔다. 내 걸음의 속도는 60대 아저씨의 그것과 어울리는 것이었던 것이다.
힘들어 길가에 앉아 잠시 쉴 때에도 아무도 물 한 모금 건네지 않았고, 아무도 말을 걷지 않았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인연의 기운은 떠나갔다고. 제주도의 어느 길 한가운데에서 나는 그렇게 서있었다. 어제와 오늘의 인연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마지막 도착지까지 걷는 일뿐이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나 남았을까. 이제는 그만 도착했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면서 또 걸었다. 그러나 또다시 광활한 바다가 나타난다. 죽을 맛이다. 바닷가를 걷겠다는 소망은 아주 아주 충분히 충족되었는데 또 바다라니....
그러나 걷자. 걸어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는 일 밖에는 할 수가. 그것 밖에는 할 수가 없다. 모래 위를 걷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을 걸으니 발과 발목이 분리되는 기분이다.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훈련하는 게 이런 맛이겠군.
마침내, 저 멀리 모래밭 한가운데에 깃발이 꽂혀있는 것이 보인다. 종료지점이다. 어쩌자고 저기란 말인가? 마지막 힘을 다해 한 발 한 발 다가간다. 마침내 도착. 그래 다 왔다. 도착지점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이 없다. 그저 길 한 가운데 그저 여기까지라고, 여기가 도착이라고 표시 하나 되어 있을 뿐이다. 이 곳을 향하여 하루종일 걸었다.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걸은 거리는 15Km 남짓. 보통 사람들보다 시간은 훨씬 더 걸렸다. 남들보다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오니 벌써 해가 기울어간다. 아무도 없이 나 홀로 출발하여 나 홀로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