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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찬수 Jan 05. 2023

우울증인은 모두 문학성을 갖고 있다.

모든 우울증인들에게 붙이는 닿지 않을 편지. 

 먼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 네 공로를 치하하는 의도만이 아닌 내 마음을 죄책감없이 꺼내오려 건네는 인사이니 너무 겸연쩍어하지는 않아도 된다는 말을 먼저 전해. 너의 절친한 벗인 내가 우울증이라는 병에 걸린 일은 아마도 교통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와 비슷했을 거라는 짐작을 해. 내가 먹구름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2년간 나를 대하는 너를 보았을 때 아마도 네가 느낀 건 접촉사고, 내가 겪은 것은 터널안 다중추돌사고였다는 점에서만 다를거야. 아마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너는 느꼈겠지. ‘접촉사고 후유증이 꽤 오래 가는 군’ 하고. 어쩌면 내가 가볍게 다친 곳에 대한 재활에 올바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되려 상처를 키우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접촉사고와 터널안 다중추돌, 그것은 실제세계에서 큰 차이지만 아까 말했듯 이제와서는 아무 상관없어. 이미 사고가 난 그곳은 날 희생자라 칭하기도 무안하게끔 다시 잘 가꾸어져 돌아가고 있거든.

  작년 겨울 우리가 마주보고 커피를 마신날 기억나는지 모르겠다. 내가 말했지. 진심에 장난 한방울 섞인 태도로 말이야. 우울증의 지루함에 대해서. 그것도 나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진심에 섞을 적당한 장난한방울을 공수하기 까지 나는 자그마치 2년이 걸린거야. 

 어쨌든 아까말했듯 이제와서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야. 심장이 아픈일이나 공황감에 대한 주기적인 걱정과 관심은 정말이지 너에게 크게 감사할 일이야. 혹시 캘린더에 써놓거나 알람을 맞추어 놓은 것은 아닌지도 가끔 생각해. 마치 여자들이 생리주기일을 기록하듯이 말이야. ‘어, 이쯤 되면 아파야하는데?’ 하고 연락하면 빙고. 역시나 내가 아프고 있는 거지.

 


 

 친구야 다시 말하지만 나를 위한 너의 우려섞인 노력의 방향은 너무 숭고해서 감히 토를 달 수 없을 지경이야. 내 우울증마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우울을 슬픔하고만 연관지어 말했던 것은 계속해서 나에게 어떤 의무감을 심어주고 있어. 슬픔을 벗어나는 것은 개인의 책임이라고 한 언급도 함께 나에게 업혀서 말이야. 마치 유령처럼. 해명할테면 해보라는 듯이.


 자, 그럼 나는 이제 해명을 해야할까? 변명을 해야할까? 많은 생각을 했어. 방금 말한 두가지 길 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답이 나오지 않았어. 지쳐갔지. 그러다가 문득 그럼 앞으로 말고, 지금까지는 어떻게 해왔을까를 생각해보게 되었어. 나는 해명을 해왔던 걸까, 변명을 해왔던 걸까? 사랑하는 이 부터 주1회 상담을 받고 있는 의사에게 까지말이야. 물론 나는 많은 경우에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설명을 하고 있던 것일 테지.


 설명이라는 말이 나온김에 한번 우울증에 대해 설명을 해볼까? 최대한 상대를 의식하지않고 객관적으로 또 간단하게만 말해보자고. 핵심만 콕콕.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은 의지과 기력을 자주 상실해. 계획을 세우는 것도 어렵지. 목표는 사치일테고. 유일하게 규칙적으로 습관이 드는 것은 자기혐오 같은 것이겠지. 모든 것이 조화롭게 섞여 아름다운 악순환을 만들어. 이는 너무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라서 굳이 나처럼 진단을 받아 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야. 단순 우울감을 겪어 보거나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힌 시기라면 쉽게 위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될 테니까. 인간이라면 말이야.

 내가 말하고 싶은 키포인트는 바로 이지점이야. 바로 이 지점이 실제 우울증을 진단받은 사람들의 자기고백을 힘들게 해. 칼이나 가위에 깊에 손이 베여본 적이있어? 바로 지혈을 하고 봉합을 하지 않으면 위험할 정도로 말이야. 그런것을 보고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하지. ‘책을 넘기다가 손끝만 베여도 아픈데 저건 얼마나 아플까’. 

 공감이란 좋은 거야. 동시에 일종의 기만이기도 해. 아는 척과 지레짐작을 넘어서는 공감을 나는 많이 찾아보지 못했어. 이건 나의 불행일까? 어쨌든, 모든 경우에 그렇게 하기는 불가능해. 저정도의 공감으로도 인간은 충분히 따뜻해져. 매번 따라서 스스로 손을 그어버릴 필요는 없잖아? 

 나는 저렇게 손이 베여본 적이 있어. 더 한 상처도 많았지. 많이 보기도 했고. 입원도 하고 수술도 해봤어. 육체적인 조치가 필요한 병을 충분히 겪어보았어. 매번 주변의 반응은 예상대로 였어. 함께 아파해주고 말그대로 그 통증에 대해 공감해주고, 필요한 조치를 모두 도움받았어.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연인이 있고 병원에 갈 형편이 되는 보통 사람들이 그렇듯이 말이야. 

 그렇지만 난 지금까지 그 어떤 육체적인 질환도 2년이상 앓아 본 적은 없어. 집안일을 해서 생기는 만성적인 습진이나 내가 타고난 아토피 같은 것은 제외하고 말이야. 아 이 미천한 시력도 논외로 하자.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지금 난 주기적으로 손이 크게 가위에 베이는 시간을 2년 간 보내고 있어. 그런데 주변의 반응은 사뭇 달라. 나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해. 전혀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 된 기분이야. “우리 행성이 파멸 위기에 처했어요. 좀 도와주세요.” 외계인인 나는 지구인들 역시 공포,불안,슬픔,긴장,우울,혐오 같은 감정을 느끼며 산다는 것을 철저히 조사하고 왔어. 그렇게 어울려 살아왔고. 그런 경험을 기반으로 도움을 구하는데 이 지구인들은 벙쪄있는 거야. 

 나는 여기서 두가지를 느꼈어. 첫째, 아직 이들도 그걸 해결해본 이들이 많지 않은 거야. 어찌저찌 해가고는 있는데 뭔가를 정립해놓으며 가는 것은 아닌거지. 둘째, 육체의 아픔 이외의 병에 대한 처치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선에서 아직 많은 논의가 없었던 거야. 그러니까 공감을 하지 못하는 거야. 공감은 공통된 의미의 공유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한데 아직 이 분야에는 그게 없는 거지. 블루오션이야. 와우.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감정의 낙차와 우울증인 상태에서 일어나는 낙차의 차이를 언어로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

조금 더 깊이가 필요한 종류의 공감이야. 요구할 수도, 마냥 바라고 있을 수도 없어서 어려워. 적어도 나의 경험상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의 사고는 산발적인 문학성의 피폭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 비우울증인-일반적인 감정변화의 스펙트럼 속에 사는-과 우울증인-스펙트럼의 경계를 크게 넘나드는 혹은 한곳에 고립되어있는-들의 소통에는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야. 

 우울증인 쪽에서 비우울증인에게 자신을 ‘설명’하게되는 상황은 이 말이 어떻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마치 아이를 가르치듯 이루어져야해. 복합적으로 꼬여있는 감정과 경험, 여러 상황들의 실타래를 간결하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해. 일종의 아포리즘같은게 필요한거야. 대신 훨씬 더 일반적이고 간결하고 단순한 언어에 녹여야하는. 이게 우울증에 문학이 필요한 이유가 아니고 대체 뭐겠어? 

 나는 여태껏 2년동안 ‘일이 힘들어서 며칠만 무기력하고 우울해도 삶이 힘든데 매일 그렇다고요? 그것도 원인도, 때도 모르고?’ 라거나 ‘발표전 그 조이는 듯한 긴장감이 이유없이 몇시간씩 간다고요?’하는 공감적 발언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어. 이상하지. 실제로 ‘발표전 긴장감’ 같은 것을 주제로 꺼내었다면 정말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았을 테야. 공감의 큰 역할은 공감을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 너네도 아는 구나’ 하는 안도감을 심어주는데 있다고 생각해.

 우울은 슬픔만이 아니라는 것을 해명해야 겠다 싶은 마음에 달려든 글인데 그것이 잘 전달이 되었을까? 나의 곤란함만을 털어놓인 기분이네. 


ps.나의 우울(우울할때의 상태)에 대해 조금더 이해해볼 아량이 너에게 있다면 읽어볼만한 것들을 밑에 소개하면서 편지를 마칠게.


 들여다보면 그것은 시각적으로 가만히 서있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을 넘어서 정신자체의 급반동(영靈이 실린 차의 타이밍벨트가 끊어진 것 같은)을 의미하거나, 

귓등의 솜털이 곤두설만큼 능욕적으로 타고 들어오는 타인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 예민함을 삼키는 중이거나, 

참을 수 없는 짜증이 몰려오나 눈앞에 있는 것이 마침 사랑하는 상대인 나머지 폭발직전의 감정수류탄을 내 피부속 두껍게 덧대진 비계 안으로 던져버리고는 그 날카로운 파편들을 다 받아내고 있는 중이거나, 

패권자없는 억압에 견디기 위한 타당성의 내벽을 양생하고 있는 중이었거나, 

오만 제안에 대한 거절의사를 밝히며 누가 나를 털뽑듯 뽑아올려 아무도 없는 쓰레기통에라도 던져주었으면 하고 느끼고 있거나, 

참을 수나 있을 만큼의 눈물만이라도 원하고 있는 중이거나, 

감정이란 것은 폭풍같은 것으로써 그 앞의 이성따위는 젖은 박스같다고 느끼고 있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안으로라도  숨어들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 할 수 없는 털젖고 날개젖은 미물같다고 느끼고 있는 중이거나, 

저녁메뉴를 생각하며 침을 삼키는 동시에 버스에 뛰어들어 보고 싶어 하거나, 

목을 스트레칭 하려 고개를 뒤로 젖힘과 동시에 시선 앞에 내려온 대들보에 목을 매어보고 싶어진다거나, 

그러면서도 날붙이는 무서워하는 자신 속 공포를 보면서 살아있는 것을 느끼거나, 

자살에도 선호가 있구나 하고 탄식하거나, 

불안이란 것은 행복앞에서는 그저 어린아이의 손가락 짓 하나로 바람구멍이 나버리는 문풍지 같다고 생각하다가도 또 고통없이는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이 느껴지거나, 

숨통이 붙어있는 인간은 마치 동그라미와 같다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첫과 끝에서 자유로워진 그 도형을 상상하며 시공간에 대한 무상함을 느껴버리거나, 

나는 성스럽고 투명하기 그지없는 물로 적셔졌으며 그것이 곧 행복의 폭포를 만든다고 확신하다가도 결국 나는 스펀지였다는 것을 자각해버리고는 이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무거워진 몸과 두뇌를 이끌고 이 모든 축축하고 바닥의 먼지를 모조리 훑어붙여대는 원흉이 바로 내가 이때까지 찾아해맸던 것들이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거나, 

그냥 심장이 미친듯 조이거나, 

내 피부위의 모든 털들이 어느순간 자라는 방향을 180도 바꾸어 모두 내 심장을 향해 점진적으로 돌격하고 있다고 느끼거나, 또는 실제로 찔리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거나, 

자신을 지나치게 신뢰해 타인이나 사물을 지나치게 불신해버리거나, 

때문에 무선이어폰을 끼고 달리며 나의 땀과 이어폰의 작은 전류가 만나 감전사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내진 않을까라고 걱정을 하다가 발가락 밑에서 부터 짜증이 올라와 달리는 것을 멈추게 되는 장면을 상상하며 스스로를 혐오하는 중이거나, 

죽기전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인간은 결국 없다고 느끼거나, 

자꾸만 죽음을 생각하면서 개인의 가진 시간의 유한성따위를 체감해버리거나, 

스스로를 끝없이 축복하거나, 

눈길에 뿌리는 소금처럼 여기저기 흩뿌려놓여진 탈출구들을 생각해보지만 이미 신작로 아래의 토양속으로 녹아없어질 소금을 생각하며 꼭 그렇게 없어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나, 

사랑으로 이루어진 테라토리와 그 토양위 자란 휴머니즘 속에 감싸여 있다가도 나를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것 또한 그것들임을 자각하고 있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뜬금없게도 뭔가 나아지고 있다고 자신하게 된 이유는 위에 나열한 대부분의 단편적인 자각성 문장들의 각도가 끝끝내 생산적이거나, 계획적이거나, 긍정적이거나, 성찰적이거나, 감상적이거나, 그저 회상적이거나, 숙명적이거나, 안정적이거나, 교훈적이거나, 감격적이거나, 그저 관찰적이거나, 기록적이거나, 전방위적으로 보상적이거나, 행동적이거나, 의지적이거나, 노출(露出)적이거나, 자립적이거나, 그룹적이거나, 주도적이거나, 가족적이거나, 이성적이거나, 균형적이거나, (적절히 경량화된 그러니까 생각에 매몰되지 않거나)사색적이거나, 의욕적이거나, 창조적이거나, 지향적이거나, 중심적이거나, 공감적이거나, 이타적이거나, 결단적이거나, 지속적이거나, 공유적이거나, 경제적이거나, 직관적이거나, 사실적이거나, 사회적이거나, 진화적인 쪽으로 아주 조금씩 틀어져 가고 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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