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나는 소설을 한편 완성했다. 중편 정도를 예상했으나 글자수만을 보았을 때는 그 이상의 분량으로 끝내었던 것 같다. 3~4개월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썼지만 열심을 기울인 노력이었다기 보다는 어떤 배설에 가까웠다. 참기어려웠다는 점에서 그렇고 내 몸에서 빠져나온 지저분한 것에 대한 일말의 혐오감 같은 것을 느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때는 그것이 완성이라고 생각했다. 내 글에 열광해주는 독자가 있어서도 스스로 만족했다는 점에서도 아닌 ‘이젠 더 이상 못하겠어’라는 소진을 느꼈던 것 같다. 분명한 것은 그 당시 나에겐 그정도 이야기는 최선중에 최선이었다는 점이고 또 분명한 것은 7개월 정도가 지난 지금의 나는 그 때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울증 환자의 치료경과로 보면 작은 기울기지만 회복을 향해 우상향해가고 있다는 점에서 마무리라고 볼 수 있고 다시 사회인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작은 기울기지만 시작쪽으로 틀어져있는 현재는 혼란의 연속이다. 너무나도 혼란스러워서 하루에 하나라도 스스로의 시간에 분명함을 더하지 않으면 오히려 너무나도 쉽게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다.
나라는 개인의 작은 변화는 사방에서 몰아치는 파도속에서 그저 비말을 일으키는 정도의 힘밖엔 없지만 그 비말을 끊기지 않고 발생시키는 의지가 나라는 존재를 지탱해주고 있다는 점이 참으로 고되면서도 자랑스럽다. 미미하지만 오늘의 나에서 내일의 나로 계속 전승되고 있는 이 변화가 7개월 전의 소설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한동안 그런생각을 아니 소설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다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미처 발현되지 못했던 뭔가가 있는 것 같다거나 아직 하고 싶은 말이, 취하고 싶은 행동이 남았다고 인물들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고 하면 조금은 작가 같이 보일까. 그런데 아쉽지만 인물들의 고함은 들어본적이 없다. 다만 지저분하게 배설된 소설은 나에게 하늘에서 내려오는 동아줄, 늪에 빠진 채 허우적 거릴때 보이는 지푸라기 같은 유일한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이제 허우적거리는 것은 멈추어야할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만들어낸 비말이 시야를 가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택과 확신 같은 것은 목숨앞에서는 사치품으로 전락한다. 산다고 결정한 나에게 동아줄과 지푸라기를 잡는 행위는 선택이 아니다.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 호흡은 선택이 아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