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23
밤사이 한 껏 야비해진 햇빛은 바람과 협력해 커튼의 역린을 비집고 들어온다. 전략적인 움직임이다. 이제 당분간 어둠은 이 공간을 지켜주지 못한다.
커튼이 펄럭인다. 바닥 근처에서 크게 한번 내뱉어진 일렁임이 천장으로 거슬러 오른다. 고지 위 정복자의 깃발처럼 맹렬했던 움직임은 천장 레일에서 내려온 고리에 가까워질수록 풀을 잔뜩 먹은 듯 빳빳해진다.
자신을 키워주고 피워주었던 옛 친구의 방문에 나무로 된 마룻바닥은 소싯적 생기 가득 내려졌던 자신의 뿌리를 추억한다. 그러나 한낱 판자 따위가 된 지금은 폭신하게 쌓이는 먼지의 흐름조차 거역할 수 없다. 어렵사리 끄집어내어 진 추억이 금세 비루해진다. 아침이 밝았음에도 전등하나 켜지지 않은 이 방은 해와 커튼이 창과 방패처럼 벌이는 전황에 따라 존재했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한다.
커튼이 설치된 벽의 바로 맞은편 놓인 침대 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한 남자가 자고 있다. 고상하지만은 않은 잠버릇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흰색 커버 드문드문 땀으로 누렇게 변색된 베개가 바닥에 떨어져 있다. 옆으로 누워있는 남자의 다리 사이에 말려있는 이불은 장인의 회오리 오믈렛 따위를 연상시킨다. 나쁜 꿈을 꾸는지 끙끙 앓는 듯한 숨소리를 내며 간헐적인 뒤척임을 보인다.
바닥이 서운하지 않도록 책상, 옷장, 창틀까지에 만개한 먼지 꽃들은 남자가 이 방을 오래 비웠다가 들어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몇 시간 전 공항에 도착한 후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짐은 풀어놓지 않았다. 가방째로 먼지 쌓인 바닥에 대충 던져 놓고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재채기라도 할만한데 그에겐 창문을 열어놓는 것까지가 자신의 방에게 건네는 최소한의 인사였던 것 같다.
남자가 한번 더 뒤척일 때 방문 밖에서 또 다른 사람의 인기척이 들린다. 이어 남자가 누워있는 방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신발이나 양말은 신지 않았다. 아마 맨발일 것이다. 남자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든다. 이어 경계하는 눈빛으로 자신의 방문 쪽을 응시한다. 그는 자신이 경계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는 모르겠나 눈꺼풀만큼은 그다지 상황에 협조적이지 않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짐작 가는 것이 있는지 몸을 전부 일으키려던 것을 멈춘다.
문고리가 내려가고 방문이 조용히 열린다. 어둠 속에서 베이지색 슬립 차림의 여성이 부스스한 얼굴로 나타난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태생부터 반으로 나뉘어 길들여진 가르마 라인을 울타리 삼아 천진난만하게 양쪽으로 넘나들어 있다. 그녀는 천방지축 뛰어노는 아이들을 한 번에 제압하듯 자신의 머리칼을 구분 없이 움켜잡고는 손가락을 갈퀴 삼아 쓸어 넘겼다.
“뭐야, 놀랐잖아.”
상훈은 연주를 보자마자 그렇게 말하고는 얼굴을 다시 이불속에 파묻었다.
“늦었네. 오랜만이야.”
연주는 상훈의 반응에 섭섭했는지 부스스했던 표정이 한층 어두워진다. 상훈을 향한 연주의 반가움에 잠시나마 환기되어 신선해진 방공기는 다시금 눅눅해진다. 연주는 상훈의 이런 반응에 익숙하다. 연주가 상훈이 누워있는 침대 맡으로 가 걸터앉자 그는 귀찮다는 듯 꿈틀 거리며 옆으로 조금 비켜 눕는다.
“그나저나 어디 있었어? 들어오면서 전혀 몰랐는데.”
상훈은 여전히 이불속에 얼굴을 파묻은 채 물어본다.
“내 침대.”
“소파? 그럼 거실에 있었다고?”
“응, 원래 알려준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길래 눈을 좀 붙이려고 했어. 그런데 그때 자기가 들어오더라고. 처음엔 놀래켜주려고 잠자코 있었지. 근데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포기했어.”
“포기?”
“무슨 오죽이 걸어 들어오는 줄 알았지 뭐야. 새벽이라 불이 다 꺼져있는데도 자기가 더 어두웠어.”
“무슨 말이야?”
“알지? 까만 대나무 말이야. 낯빛은 까맣고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가 딱딱하게 굳어서는. 잘못 건들기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뚝 하고 부러져버릴 것 만 같았는 걸.”
연주는 마치 범죄현장의 목격자라도 된 듯 자신이 본 것을 정신없이 진술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냥 피곤했을 뿐이야. 사람은 피곤하면 보통 그래.”
상훈은 여전히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연주를 향해 무뚝뚝한 대답을 날렸다. 논리적이지 않은 핑계라는 것은 그도 안다. 피곤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정도를 구분 못하는 사람은 없다. 상훈은 내뱉은 말에 대한 후회를 마른침과 함께 꿀꺽 삼켰다.
“아무튼 나는 다시 소파로 갈 테니 자고 싶은 만큼 자고 말을 걸어줘. 그러면 피로가 좀 풀리겠지? 사람은 보통 그러니까.”
연주는 상훈의 말을 살짝 비꼬아 되돌려준다. 방문을 열어 다시 거실로 나간다. 닫힌 방문 넘어 냉장고 문을 여는 소리, 나란히 놓여있는 유리물병을 꺼낼 때 그것들끼리 부딪혀 나는 맑고 높은 소리가 들린다. 몇 초간의 침묵이 있은 후에 아까와 같이 맨발로 마룻바닥을 걷는 소리가 난다. 이번엔 그로부터 멀어진다는 점이 다르지만. 이내 가죽소파가 푹 꺼지며 공기를 내뱉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다시 정적이 찾아온다. 상훈은 한번 더 뒤척이고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상훈은 그 뒤로 7시간을 더 잤다. 오후 2시. 시간은 어느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꿈의 내용 어느 부분이 그를 괴롭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흰색 얇은 티셔츠가 식은땀에 젖어 살갗에 달라붙어있었다. 침대에서 몸을 떼자마자 잠옷과 속옷을 새것으로 갈아입는다. 좀 전까지 바싹했던 새 옷은 미처 마르지 못한 땀으로 금세 다시 젖는다. 샤워를 할 생각은 없다. 옷을 다 갈아입고는 뭔가 생각 난 듯 방문 쪽을 잠시 쳐다본다. ‘아직 있을까?’ 하고 연주를 떠올린다. 그러나 결국 연주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문을 열고 맞이해주지는 않는다. 대신 방향을 틀어 구석에 던져놓았던 가방을 향해 걸어간다. 몇 시간 전 연주가 자신을 맞이했던 일은 마치 꿈이었다는 듯이.
상훈은 한쪽 지퍼를 열고 노트북 컴퓨터와 충전기만 꺼내어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몇 가지가 꺼내어진 가방 안에는 옷 몇 벌과 세면도구를 담는 것으로 보이는 파우치 한 개 정도가 남는다. 오랜 여행을 한 가방 속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흔적 같은 건 없다. 가방 안은 여행을 떠나기 전날의 가방처럼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오히려 더 짐이 적어진 것 같기도 하다.
빨랫감과 새 옷을 뒤엉키게 쑤셔 넣어 놓지도 않았다. 부탁받은 면세품들 때문에 터지기 직전의 지퍼도 없다. 지퍼는 스스로에게 부담 없는 장력으로 평온히 닫혀 있다. 여러 곳을 누비면서 얻은 교통티켓, 영수증, 입장권 따위가 버린 듯 보관되어 가방의 밑바닥에 구겨져 있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것들은 풀어놓는 짐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여행용 옷과 옷장 용 옷이 따로 있는 것이다. 상훈이 방을 대했던 태도로 추측해 볼 때 어쩌면 옷장에는 옷 같은 건 없을 수도 있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도록 일정별로 꾸려진 상비 가방만이 가득 차 있을지 모른다. 일이 생기면 안을 열어볼 것도 없이 용도에 맞는 가방을 꺼낸다. 효율적이다.
상훈은 꺼내 놓은 노트북 컴퓨터 앞에 앉았다. 워드프로세서를 켜고는 뭔가 생각을 정리해보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문장을 썼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한다. 머릿속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지 금세 그의 눈썹과 광대가 짜증으로 일그러진다. 상훈은 머릿속으로 연상하고 생각하고 결론짓는 일련의 과정이 서툰 편이다. 머리로만 생각하려 하면 이성적으로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자꾸 감정적이고 부정적인 목소리가 끼어든다. 이내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거나 그릇된 결정을 하고 만다.
상훈은 가끔 자신의 뇌와 심장의 위치가 바뀔 때가 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뭔가를 쓰거나 정리하거나 걷는 등의 육체의 움직임이 수반되어야 비로소 이성적이거나 객관적인 결론을 내놓고는 실천한다.
생각을 정리하는데 시작이 매번 너무 힘든 것이 아니냐는 쓴소리를 매번 자기 자신에게 쏟아부으며 책망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 일련의 과정으로 내려진 생각만은 상훈의 삶에 후회와 피해를 가져다준 적은 없었다. 그 자신이 느끼기에 스스로 굉장히 만족할 만한 생각과 마음이 편한 결론들만이 찾아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상훈은 자신이 가진 뇌의 불편한 작동방식을 그저 탓할 수만은 없다.
눈썹이 가운데로 모이고 입술에 힘이 들어간다. 잠시 고민하다가 몇 번이고 지워가며 겨우 끄집어내었던 세줄 정도 되는 한문단을 미련 없이 지워 버린다. 이제 모니터에는 흰 바탕에 1cm 남짓한 길이의 까만 세로줄만 깜박 거리며 남는다. 이내 그는 단어 하나를 쓴다.
‘오죽’.
인터넷 창을 열어 포털사이트 사전에 단어를 검색해본다. 한자어의 뜻풀이를 찾아본다. 뜻을 모르지는 않는다. 연주가 한 말의 의미를, 귀가하던 자신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가까이 체감하기 위해서다. ‘烏竹’. ‘까마귀 오‘에 ‘대 죽‘. 영어로는 ’black bamboo’. 역시 볼 것도 없이 각국의 언어로 ’ 까만 대나무’를 뜻하고 있다. 상훈은 뜻풀이 옆에 있는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무성하게 나있는 까만색 대나무들의 군집이다. 그러다가 키보드에서 손을 뗀 채 의자 등받이에 털썩하고 힘없이 기댄다.
‘오죽이라니’
상훈은 연주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벙쪄있을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는 평소 성격이 굉장히 예민한 편이다. 자신의 집에 조금의 변화만 있어도 금세 알아챈다. 업무에 지쳐 아무리 피곤하고 녹초가 되어 들어와도 작은 물건 하나가 제자리에 있지 않으면 정리를 한다. 다행히 그리 많은 물건을 가지고 사는 편은 아니라서 그 예민함이 병적으로 발전되어 삶에 지장을 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약간의 강박증세는 있다고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 그런 그가 사람 한 명이 소파에 있는데도 몰랐다. 상훈은 뒤늦게 찾아온 작은 충격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리 캄캄한 새벽이었고 불이 전부 꺼져있었다고 해도 평소의 그로써는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아마 십중팔구 상훈을 옆에서 오래 본 사람이었다면 알아채고도 못 본 척 방에 들어가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상훈은 연주가 아직 거실에서 자고 있는지 깨어서 기다리고 있는지에 대해 뒤늦게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녀가 보고 싶어 졌다기보다는 소파 위에 무엇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실히 해두고 싶어 졌다고 하는 게 맞겠다. 연주가 아직 기다리고 있는지 집으로 돌아갔는지는 관계없었다.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그녀의 존재 유무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무언가 정리되지 않은 물건을 그대로 둔 듯한 찝찝함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상훈은 노트북의 전원을 끄지 않은 채 그대로 덮어 놓고 책상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열고 나가 거실에 있는 소파 쪽을 바라보았다. 연주는 없었다. 아침에 들렸던 소리의 경로 그대로를 따라간다. 냉장고 문을 열고 마시던 물병을 꺼내며 유리를 부딪히고 컵에 물을 따라 마신다.
온기가 아직 남아 있을까 기대하며 소파로 가서 앉는다. 차갑다. 공기가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역시 꿈이었나’. 이제는 귀국길에 연주에게 도착 예정시간을 알려주기는 한건 지도 헷갈린다. 알려주지 않았다면 연주는 아직 그가 스페인이나 구름 위에 있는 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왠지 기분이 묘했다.
상훈이 그렇게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현관 도어록의 커버를 열고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연주다. 이 집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이는 그녀와 그 둘뿐이다. 상훈은 자주 어딘가에 떠나 있기 때문에 아마 집을 사용하는 시간으로 소유권 분쟁 같은 걸 했다면 이 집은 진작에 연주에게 권리가 넘어갔을 것이다. 집주인인 그가 새벽에 누르고 들어왔던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번호를 입력하는 소리가 들린다.
연주는 긴 갈색 생머리를 대충 틀어 올려 집게핀으로 집어 놓고는 언제 가져갔는지 옷장 안에 있던 상훈의 검은색 트레이닝팬츠를 입고 있었다. 가르마는 정리되어있었다. 상의는 흰 티셔츠 위에 회색 카디건을 단추도 잠그지 않은 채 대충 걸치고 있었다.
슬리퍼를 벗는 맨발을 보니 멀리 다녀온 것 같지는 않다. 손에는 작은 비닐봉지가 들려있다. 상훈은 간밤의 연주를 따라 해 보기로 한다. 인사를 건네지 않고 소파를 엄폐물 삼아 최대한 숨죽이고 관찰하기로 한다. 그러나 지금은 대낮이고 상훈은 연주보다 훨씬 체구가 큰 탓에 금세 발각될 것이 뻔하다. 연주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 버리지 않고 소파가 있는 거실 바로 옆 주방에서 비닐봉지 속 물건들을 정리한다.
“그래서 나는 뭐처럼 보여?”
연주는 소파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을 채 입을 연다. 상훈은 힘이 좀 빠진다. ‘역시 알고 있었나 ‘.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간다. 계속 등을 보인채 봉지 안의 물건들을 식탁 위에 꺼내놓는 연주의 뒤로 다가간다. 상훈이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연주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얼굴과 표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툭 던진 한마디 의문문만으로는 현재 그녀의 감정이 어떤지 읽을 수 없다.
상훈이 자고 있는 사이 샤워를 했는지 연주와 가까워질수록 그가 자주 사용하는 샴푸 냄새가 진해졌다. 연주에게 거의 도착했을 때쯤 상훈은 연주의 허리춤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고개를 살짝 숙여 연주의 오른쪽 어깨 위에 턱을 가져다 대고 기댄다. 키 차이가 꽤 나는 탓에 상훈은 좀 어정쩡한 자세가 된다. 그제야 연주는 고개를 살짝 돌려 옆얼굴을 보여준다. 눈은 살짝 아래를 보고 상훈을 이해한다는 듯이 입꼬리를 움직여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인다.
연주 입가의 미소를 본 상훈은 조금은 안심하고 허리에 있던 팔을 위로 들어 올려 그녀에게 완전한 포옹을 한다. 양팔이 감싸진 연주는 그제야 자연스레 물건을 정리하던 움직임을 멈추었다. 상훈의 팔 안에서 연주는 반 바퀴 돌아 상훈을 올려다본다.
“그래서 나는 뭐처럼 보였어?”
하고 연주가 다시 되묻는다.
‘모순 덩어리’ 하고 상훈이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연주를 겨냥해서 한 말은 아니다. 운이 나쁘게도 그녀의 차림새가 상훈의 마음 한켠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응?”
연주는 알아듣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궁금해한다.
“미안. 그냥 혼잣말이야. 너무 배가 고파서 제발 그 비닐봉지 안에 먹을 것이 있게 해달라고 빌고 있었어.”
상훈은 일부러 살짝 능글맞은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장난스럽게 말했다.
“시리얼이랑 우유뿐이야.”
연주는 체념한 듯 상훈을 살짝 밀쳐내고 팔 안에서 벗어난다.
“달걀은 있어?”
“냉장고에.”
연주가 손가락으로 냉장고를 가리키며 대답한다.
“좋아, 우리 늘 하던 것처럼 시리얼이 우유를 잔뜩 머금을 때까지 기다리면서 달걀프라이를 시작하자.”
연주는 작은 그릇을 꺼내 시리얼을 담고 우유를 부었다. 그동안 상훈은 냉장고에서 달걀을 두 개 꺼내고 또 뭔가 먹을 것이 있는지 찾아본다. 아쉽게도 더 먹을 것은 없었다. 우유와 시리얼, 달걀프라이로 간단하게 끝낸 식사 후에 연주는 곧장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연주가 새벽까지 들인 노력에 대해 상훈이 돌려준 것은 고작 달걀프라이 하나를 요리해주는 정도의 노동이었다. 연주를 만난 지는 이번 달로 2년이 조금 넘어간다. 그녀는 약 6개월 전부터 그에게 무언가 변화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이 그와 그녀의 관계에 무시하지 못할 영향을 이미 미치고 있다는 것도. 상훈이 그것을 모르고 있지 않다는 것 또한 연주도 알고 있다. 연주는 내색 하나 없이 상훈의 페이스에 맞추어 한결같이 곁을 맴돌아주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상훈은 연주의 노력이 실제로 둘의 관계에 도움이 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 있는 답을 할 수 없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연주는 연주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훈으로써는 자신이 그 변화에 대한 답을 찾기까지 그녀가 지치지 않아 주기를 바랄 뿐이다. 상훈은 조금 전 현관을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에서 여행지 속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밑창이 얇아진 슬리퍼, 실밥에 쓸려 항상 같은 자리에서 아물고 쓸리는 발등의 작은 상처, 손에 들린 비닐봉지, 그 안의 들어있는 싸구려 음식, 옷으로써의 품위는 애 진작에 잃어버린 채 박음질에만 의지해 근근이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면티셔츠, 총체적인 모순덩어리.
상훈만의 독특한 여행 방식은 연주가 그를 비꼬는 소재로 자주 전락될 때가 많다. 그러나 그만큼 상훈이 자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뭔가를 고집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후줄근한 차림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지만 가난한 배낭여행 따위를 모토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상훈의 여행은 기본적으로 현지인들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머무르는 여행지에 최대한 동화되어보는 것을 추구한다.
그렇게 진행되는 물리적인 일상에서의 탈피 즉, 여행이 상훈에게 가장 크게 시사하는 바는 새로운 세계라는 투명한 물속에 자신을 한 방울 떨어뜨려볼 수 있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세상이라는 물을 혼탁하게 만들며 동시에 진한 물감 한 방울이었던 자신들을 흐려지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것이 세계가 늙어가는 과정인 것이라고 상훈은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새로운 장소에 일정 부분 자신의 색을 입혀놓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상훈의 삶에 자연스레 여행이 스며든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그의 부모님은 상훈을 데리고 어디든 다녔다. 그들은 상훈에게 본인들이 들고 다니는 여행가방보다는 높은 관심도를 보여주긴 했으나 상훈은 자신이 그저 가방 지퍼에 달려 있는 액세서리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부모님과 함께 했던 많은 여행들은 그의 삶에서 떠남에 대한 두려움과 거리낌 같은 것을 깨끗이 지워버렸다.
그러나 액세서리 따위의 시점에서 겪은 여행은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여러 도시들을 방문했으나 스치듯 지나갔고 수북이 쌓이는 것은 기념품 가게의 영수증들 뿐이었다. 외지인의 편리에 맞추어진 장소에서만 밥을 먹는 것, 세계 어딜 가든 동일한 수준의 서비스와 질을 기대할 수 있는 브랜드 호텔에 머물다가 오는 것이 상훈에게 남겼던 것은 항상 깊은 아쉬움과 호기심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자신의 세대가 쉽게 경험하지 못했을 것들에 대해 떠들어대는 것에만 집중했다. 귀국 후에는 항상 이야기가 끝내 자신의 입에서 마저 거부당할 때까지 모든 지인들을 동원해 술자리를 주선했다. 술값은 이야기꾼인 부모가 항상 치렀다. 역사적으로도 이야기보따리와 술값을 동시에 제공하는 이야기꾼은 흔치 않다. 따라서 술과 음식이 고픈 자들은 감내하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한두 번 얼굴을 비춘 후 사라져 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액세서리는 모든 것이 자신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여행에 대한 갈망을 키웠다. 안전장치조차 필요 없는 회전목마보다는 안전장치가 있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살던 집을 내놓고 몇 년이상 떠도는 여행은 하고 싶지 않았다. 상훈은 항상 일정기간 떠나 있으면 떠나온 곳을 그리워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게 여행과 일상은 그의 마음속에 균형 잡힌 시소를 만들어냈다.
상훈은 액세서리 생활의 영향으로 인해 남들이 주로 찾지 않는 장소만을 주로 탐색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것은 다행히도 그가 가진 여행 철학의 핵심 개념이었던 주체성과 여행작가라는 그의 커리어에도 일정 부분 힘을 실어주었다. 가끔 그 안에서 튀어나오는 엉뚱함이 고집을 부릴 때에는 남들이 날아갈 때 그는 배를 타거나 기차를 탔다. 그리고 남들이 배를 타거나 기차를 타면 그는 자전거를 타거나 오토바이를 탔다. 남들이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면 그는 걸었다.
그러나 더 열악함으로만 기울어지지는 않았다. 상훈은 마음에 시소를 갖고 사는 사람이다. 남들이 주로 걷거나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경로를 그는 비행기로 휙 하고 뛰어넘어버리기도 했다. 그래도 위험하거나 무모한 시도는 하지 않는다. 현지에, 동료 여행자들에게 누가 될만한 행동은 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상훈은 그 점에 대해서는 철저히 생각하고 여행을 기획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좀 딱딱하고 재미없어 보이지만 현지 정부의 권고사항을 지키고 현지인들의 조언을 묵묵히 따르면 그만이다.
상훈의 여행에는 남들에게 내놓을 만한 자극점 같은 것은 없다. 놓치고 올 수 있는 스릴도 있겠지만 그것은 여행 속 한낱 초콜릿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분 상승만을 위한 지속적인 복용은 장기적으로는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상훈이 가진 이런 일련의 사고방식 속에는 사실 남들에게 피해가 가는 것을 우려하기보다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싫다는 마음이 앞서있다. 그래서 더 본능적으로 철저하게 자신이 정한 원칙을 지켜나갈 수 있는 것이다.
상훈은 자신이 절대 즐겨 찾지 않을 여행지에 대해서도 가끔 생각한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장소는 많은 영혼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한다. 다수의 선택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짓은 섣불리 하지 않는다. 유구한 역사, 경이로운 자연환경, 친절한 사람들, 다채로운 문화, 선진적인 인프라 시설 등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고 떠나는 것을 반복해야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끊임없이 죽음과 창조가 반복되는 과정에서 발전이 있으며 그것을 지켜내려는 의식을 가질 때 비소로 유지될 수 있다. 이 모든 사실에 동의하고 부정할 계획은 없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이다. 상훈은 또다시 유명세의 그림자 쪽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다소 세간의 주목받지 못하는 곳,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방향키를 잡는다.
여행자의 신분으로써 각국의 동반자들이 주로 모이는 곳에 가는 것 또한 좋은 경험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나오길 두려워한다면 여행자의 사고는 그 집단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고립된다.
상훈은 그런 자신의 여행 과정을 사진과 짧은 글의 형태로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주기적으로 업로드할까도 생각했었다. 흔히 좋아하는 것에 대한 열정이 깊어지면 주변에도 알리고 싶어 진다. 동시에 좋아하는 것을 혼자만 즐기다 보면 누구나 조금은 외로워진다. 공감받고 싶어 진다. 신선함을 찾는 사람들이나, 혼자 하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 여행에 대한 자신 생각을 공유하고 싶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소셜미디어에 공감하고 그를 추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상훈의 직업은 주간지에 연재하는 여행작가이기 때문에 아마 ‘자기 홍보’의 역할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상훈은 ‘남들이 하지 않는 선택’에게 발목을 잡혔다. 차별화의 날개에 추진력을 주지 못했다. 안전장치가 있는 롤러코스터가 레일을 벗어나 인도로, 주택가로까지 치고 들어갔다. 그순간 이미 탑승객의 안전벨트 따위는 그 의미를 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