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본에서 미대를 졸업했다.
한국에서는 미대조차 생각하지 않았던 내가 일본 미대 유학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그저 평범한 여느 고3 못지않게 수시 논술전형을 새벽까지 학원에서 첨삭받으며,
배치표를 보며 정시에는 어떤 대학을 지원할지 고민하며 지내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때도 그저 주어진 대로 수능을 보며 다 같이 정해진 길을 떠나야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정작 수능점수도 그저 그래서 고민 없이 재수의 길을 택했다.
주변의 친구들이 그저 재수는 필수라고들 하길래 나도 재수했다.
수능을 두 번 치르기는 죽어도 싫었지만,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 괴로웠기 때문에 1년은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고 재수학원에 등록을 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고3 때보다 점수가 더 나오지 않았다. 더 이상 수능을 보려는 의지조차 사라졌을 때
나는 그냥 점수에 맞춰서 대충 4년제 대학 아무 학과나 지원했다. 정확히 말하면 문과인 내가 그나마 선택할 수 있겠다 생각한 학과가 일본어학과였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 나는 하고 싶은 게 없었다. 억지로 대학교를 등록하고 억지로 2학년까지 다녔을 무렵, 휴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학교에 가겠다고 집을 나서서 학교에 가기 싫어 괜히 엉뚱한 곳으로 자체 휴강을 했다. 장소는 학교 이외의 곳이면 어디든지 자체 휴강이 가능했다. 어느 날은 훌쩍 공항에 가서 비행기만 보는 날도 있었고, 한강공원에 가서 한강만 보던 날도 있었고, 되는대로 지하철에 목적지 없이 처음 가는 곳에 내려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은 털레털레 삼청동 갤러리 거리나 인사동 거리에서 보낸 시간들이다.
학교에서는 교양강의로 들었던 미술사 수업과 독일 예술 수업이 그나마 내가 유일하게 출석을 했던 수업이었다. 오히려 더 예술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3학년이 될 무렵 나는 공연장 아르바이트를 하며 휴학을 한다. 공연장 아르바이트는 생각보다 나에게 큰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매일같이 예술을 즐기러 오는 사람들 속에서 일은 정말 힘들 때도 있고, 감동할 때도 있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난 가까이에서 사람과 예술을 연결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매일이 즐거웠고, 때로는 그 장소 자체에 있는 내가 살아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부터 나는 예술과 사람을 연결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그런 직업을 어디서 할 수 있는지 막막했다. 또 나는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음악을 감상하고,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림을 감상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품곤 했다. 예술을 즐기는데에 있어서 장애가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가까이에서 예술을 감상하는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니 생긴 자연스러운 의문이 나를 유학의 길로 인도할 줄은 몰랐다.
그 당시에 한국은 아직 시각장애인의 안내견이 공연장을 입장한다는 것 자체에 불만 섞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상당수였다. 지금은 또 인식이 많이 바뀌었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아르바이트를 했을 당시에도 대놓고 불쾌감을 표현한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을 보며 장애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에게 예술을 감상하는 데에 있어서 어떤 민폐를 끼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의문을 안고 공연장 아르바이트가 끝나갈 때쯤 대학교에 다시 복학하기 싫어서 1년간 일본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 기로 한다.
정말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낯선 땅에서 내가 1년간 지낼 수 있을까?
사실 그냥 도피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한국에서의 나를 지우고 새로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던 마음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나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한 달만에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하고 워홀 비자를 받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워홀 비자를 받자마자 나는 짐을 싸고 도쿄로 떠났다. 떠나기 전날 밤 내 인생에 있어서 내가 처음 선택한 새로운 길이라고 생각하니 두렵기도 했지만 조금 두근거리기도 했다. 1년 간 아르바이트하며 모아둔 돈과 집세 몇 푼 만을 가지고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드디어 현실이구나. 올 것이 오고 말았다.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