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okyo designer Nov 13. 2020

1.시작은 워킹홀리데이  


Yorozu Tetsugoro - Nude Beauty 萬鉄五郎《裸体美人》 1912年, 162.0 ×97.0cm, キャンバス・油彩, 重要文化財, 東京国立近代美術館蔵


나는 무작정 일본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겁도 없이 일을 저질렀지만, 그 당시에는 내가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고 나는 곧장 한 달 만에 떠날 준비를 했다.  준비물은 챙겨도 챙겨도 모자란 느낌이 들어 결국 전날 밤까지 가방을 풀었다가 다시 싸기를 반복했다. 잊어버린 것이 없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나니 짐이 거의 국제 이사급이었다.

커다란 27kg짜리 캐리어 두 개를 낑낑대며 터질 것 같은 백팩에 크로스백도 모자라서 추가 수화물로 이불까지 부쳤다. 공항까지는 어찌어찌 부모님이 바래다주셔서 갔지만, 정작 문제는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부터였다.


 하네다 공항에서 신주쿠까지는 의외로 금방 도착했다. 그러나 나는 신주쿠역에 도착하자마자 울 뻔했다.


여기가 어디고 나는 누구지...


인터넷으로 계약한 셰어하우스에 가기로 되어있지만, 가는 길을 전날 밤까지 복습했지만 역시나 현실과 상상은 달랐다. 어디서 어떻게 갈아타야 하는지 막막해서 정말 기본적인 일본어로 역무원에게 물어봤다. 

사실 역무원에게 말을 거는 것부터 험난한 도전이었다. 몇 번이나 말을 걸까 말까 망설이고 내 짐들이 잊어버리진 않을지, 신주쿠의 어마어마한 사람들의 인파 속에서 나는 첫 퀘스트를 깨야만 했다.


 다행히도 내 일본어가 통했는지 갈아타야 할 곳을 알려주셔서 무사히 전철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계단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시나가와에서부터 역을 갈아탈 때마다 항상 낑낑대며 짐을 들어 날랐다.

한 번에 가는 직행 전철을 타고나니까 나름 안도감이 생겨서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기도 했다.

(물론 캐리어 두 개와 이불 보따리, 백팩, 그리고 크로스백까지 맨 상태) 어깨는 부서질 것 같이 아팠고, 짐 때문에 자리가 나도 앉지 못해서 서서 가야만 했지만, 창밖의 풍경은 너무나 평화롭고 모든 게 새로웠다.


'이제 이곳에서 정말 사는구나...' 


비록 1년 뒤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1년간의 워킹홀리데이를 후회 없이 보내고 싶었다.

거의 종점에 다 달았을 때쯤 역에 도착하고 내리니 벌써 어두컴컴해지고, 역에서 마중 나온 셰어하우스 담당자분을 만나게 되었다. 감사히도 차를 가지고 오셔서 짐을 싣고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역에서 걸어서 15분 거리는 자동차로 금방이었다.


셰어하우스는 인터넷에서 본 그대로였다. 오자마자 여러 가지 입주 절차를 거치고 드디어 열쇠를 받아 내 방에 도착한 순간 정말 작고 아담한 방이지만 왠지 모르게 정감 갔다.

침대, 책상, 냉장고, 오 시 이레 (일본의 이불장 같은 수납장) 그리고 자그마한 현관 이 전부였지만, 나는 이 자그마한 방도 감지덕지 

짐을 풀을 세도 없이 곯아떨어졌다. 


첫 일주일은 눈코 뜰 새 없이 지나가버렸다.

여러 가지 핸드폰 개통이니, 은행 계좌 개통이니, 구약쇼에 가서 해야 할 신청들을 마치니까 

내 힘으로 생활을 해가는 기분이 들었다. 여러 가지 도움을 얻기도 하고, 아직 미숙한 일본어로 이런저런 절차들을 끝내고 나니 더없이 기쁠 수가 없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이상한 자신감이 생기고, 방도 조금씩 꾸미고 필요한 살림살이들을 들이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니 조금씩 아르바이트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것은 좀 더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당시 나는 JLPT N2 자격증을 갖고 있었지만 역시나 현지에서 원어민과 대화를 하기에는 한참 부족한 실력이었다. 더군다나 네이티브 스피커의 스피드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해 아르바이트를 구하는데 주저주저하기도 했었다.


처음에는 아르바이트 정보지를 모아 시급과 거리를 계산하기도 하고, 집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에 지원해서 교육까지 받기도 했었지만, 뭔가 이거 다 하는 아르바이트를 찾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기만 했다. 

그렇게 3개월째 돈이 다 떨어져 가던 때에 나는 하나의 목표만 정하기로 했다. 이왕 아르바이트를 할 거면 내가 일하고 싶어 지는 곳에서 하자. 나는 무지 루시(無印良品) 덕후였기에, 집 근처 지역의 모든 무인양품에 아르바이트 지원을 했다.


물론 아르바이트를 인터넷으로 지원해도 전화로 면접 일정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전화로 버벅 거리며 일본어를 못하는 것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전화를 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하고 연습했다. 지원한 점포들이 거의 다 불합격이고, 아르바이트가 아닌 정사원만을 구하는 등 조건에 맞지 않은 곳들도 여러 군데 있었다. 마지막 남은 기회로 집에서 조금 멀리 있는 무지에 이력서를 보냈다.



그 결과 집에서 조금은 떨어져 있지만 큰 쇼핑몰 내 무지에서 일하게 되었다. 나를 뽑아주신 점장님은 좋은 분이신 게 틀림없다.

그러나 나를 뽑고 한 달 만에 다른 지점으로 가신다고 하셔서 나는 새로운 점장님과 그만둘 때까지 일해야 했다

아르바이트는 생각보다 일도 많고, 손님한테 치일 때도 있고, 일하다가 눈물이 날 때도 종종 있었다. 8시간 동안 서서 일하는 것은 체력적으로도 처음엔 너무 힘들었다. 후반으로 갈수록 적응은 되었지만, 힘들었다.

아르바이트만 구하면 행복할 거라 생각했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교통비를 아끼려고 걸어서 1시간 거리를 자전거 타고 30분씩 매일같이 왔다 갔다 했다. 겨울은 정말 자전거를 타는 것이 손 시리고 추워서 완전히 무장하고 나가기도 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페달을 돌리다가 미끄러져 자전거에서 떨어진 적도 있었지만 그때는 그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했다.


 그래도 일에서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또래들도 많이 있어서 재밌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무지 상품을 직원 할인가에 살 수 있다는 점이 제일 좋았다..... 

그리고 슬슬 워홀 이후의 생활에도 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고등학생부터 이름만 알고 있던 도쿄에 있는 미대들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미술 공부를 하고 싶었다. 사람과 예술을 연결하는 것에 줄곧 갈증을 느꼈다. 

이곳에서는 그런 공부가 가능하지 않을까?


일본 대학들은 6~7월 오픈 캠퍼스 기간이 있다. 그때 입시설명회나 지원하고자 하는 학과 교수님과 상담이 가능하다. 나는 눈여겨보았던 미대 두 곳을 돌며 교수님과 이야기해보기도 하고 학교 분위기를 읽고 정하기로 했다.

나는 그림을 그리거나 무언가를 만드는데 소질이 있다고 느껴 본 적이 없어서, 실기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곳이 아닌 문과 성향을 띤 예술학을 전공하고 싶었다. 미술비평과 미술사 그리고 박물관학 전시기획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에 맞춰 일본 유학시험(EJU)도 준비했다. 이것도 시험을 보기 위해서 한국에 있을 때 수험 등록을 해야 해서 한국에서 미리 대행을 통해 시험 접수하고 그 해 워홀로 떠난 해 6월에 운 좋게 바로 유학시험을 일본에서 볼 수 있었다.


낮에는 무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엔 집에 돌아와서 일본어 공부를 했다. 오픈 캠퍼스를 다녀온 이후부터는 좀 더 구체적으로 소논문이라던가 작문 쓰는 법, 에세이 등을 읽으면서 공부했다. 공부하는 것조차 즐거웠던 적이 얼마 만인지 몰랐다.


좋아하는 공부를 하니까 전혀 수험공부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1년 워홀 동안 차근차근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목표를 이룰  1년간은 한국에 돌아가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재수 때와 같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1년이었다.




이전 01화 0.일본으로 오기까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