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대에서는 무엇을 배울까.
미대에 입학하기 전에 나도 궁금해했다. 도대체 미대에서는 무엇을 하는 걸까.
가장 먼저 미대라고 하면 생각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 미대생들은 전부 다 그림을 잘 그릴까?
나는 사실 그림을 못 그린다. 오히려 어릴 적 그린 그림이 더 잘 그렸다. 그렇다면 그림도 못 그리는 내가 미대에는 무슨 수로 들어갔을까.일반적으로 일본에는 한국처럼 종합대학 안에 단과대로 미대가 있는 구성은 극히 드물다. 미대, 음대, 상경대, 각자 독자적인 대학들이 꽤 많다. 물론 종합대학도 있지만 한 가지 학문에 특화된 특수목적대학교(?) 같은 느낌의 학교들이 많다. 나는 일본에 오기 전 까지는 한국의 종합 대학에 익숙해져 있어, 일본의 미대만 있는 캠퍼스가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했다.
그렇게 들어간 미대는 꽤 아기자기 하지만 있을 건 다 있다.
도서관과 미술관뿐만 아니라 영상자료실, 그리고 각종 재료를 살 수 있는 세카이도(世界堂:화방 재료나 문구류)에 식당 매점 빵집 등등..
시설에도 나름 신경을 써서 전 학과 공용 컴퓨터와 학과별 컴퓨터는 전부 매킨토시였다.
학과는 크게 파인아트와 디자인으로 나뉜다.
파인아트는 말 그대로 순수미술, 일본화, 유화, 조각, 판화 등의 전공이 들어가고 디자인은 영상, 공간 디자인, 패션, 공예디자인, 기초디자인, 정보디자인, 시각 디자인, 건축, 예술 문화학 등이 들어간다. 미대라고 해서 모두 그림을 그리지 만은 않다는 것.
그러나 1학년이면 공통교양과목을 들어야 만한다. 필수조건으로.
일본은 한국처럼 자유로이 선착순으로 수강신청을 해서 자신이 듣고 싶은 과목을 듣는 것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들어야할 과목들이 학년에 따라 정해져 있다. 그 시간 이외에는 수강신청으로 듣고싶은 과목을 듣는 구조이다. 그러므로 오전 수업이 싫다고 해서 오후로 시간표를 짜고 이런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또 학기초에 신청한 시간표는 1년짜리라서 1년을 어떻게 보낼지가 여기에 달려있다. 한 가지 더, 일본 대학의 수강신청은 대부분 선착순이 아니다. 추첨제도이다. 나는 이 점이 오히려 선착순 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는 아침 9시부터 학교 근처 피시방에서 누가 먼저 꿀 빠는 강의를 선점하느냐에 희비가 갈리곤 한다.
다시, 공통교양에서는 미대스러운 것을 한다. 예를 들어 드로잉을 한다던지 조각을 한다던지 하는 것들이다.
당시에는 주 6일 수업에 4주간의 텀으로 강평과 끊임없는 과제가 나왔다. 입학하자마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돌아갔다. 대학생인데 주 6이라니! 그것도 1교시부터! 청천벽력과도 같았고, 각각의 수업은 저마다 지각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으름장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리는 것이나 조각하는 것이나 영 소질이 없어 보이고 자신이 없었다. 이 교양 수업은 학기 초에 열리는 것이라 아직 아이들끼리도 서먹서먹한 채로 저마다의 작품을 만들어나간다. 그중에서는 엄청나게 잘하는 친구도 있었고, 참신한 아이디어로 모두를 놀라게 하는 친구도 있었다. 4주간 저마다의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강의평가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에 한 명씩 어떤 배경으로 작품을 만들게 되었는지 발표하고는 한다. 나는 작품을 만드는 시간보다 강평시간이 더 기다려졌다. 처음 보는 친구들이 다들 저마다 어떤 배경으로 어떤 표현으로 이런 작품을 만드는지 듣고 나면 저절로 내적 친밀감이 생긴다. 그래서 그 후에는 이름은 몰라도 아 그때 그거 만든 그 친구!라고 이야기가 가능하게 된다.
미대 4년 중 나는 1학년이 제일 바쁜 것 같다. 새로운 학교에 적응해야 하는 것도 오로지 나의 숙제이고, 처음 보는 교수와 수업에 따라가는 것이 벅차기만 할 때도 있었다. 2학년 이후부터는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도 하고 이제 나름 자기가 하고 싶은 길을 모색해 나가기도 한다. 3학년에는 제미(ゼミ)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자신과 맞는 교수를 택해 졸업전시까지 연구를 한다.
미대에서는 여러 가지 수업을 제공한다.
위와 같은 정말 실기 위주의 수업을 하기도 하지만, 나의 학과 같은 경우는 대부분 강의식 수업이나 토론식 수업이었다.
강의식 수업에서는 서양미술사, 일본 미술사, 동양미술사나 박물관학, 아트 매니지먼트, 웹 디자인, 디지털 디자인 등등의 수업이 있었다. 강의식 수업은 무난했던 것 같다. 나에게 잘 맞는 교수도 있던 반면에 맞지 않는 교수님도 있었다.
토론식 수업에서는 영어로 토론하는 수업도 있었으며 예술에 관한 토론을 즐겨하던 수업도 있었다. 나는 꽤 토론식 수업이 좋았다.
일방적인 강의 보다도 토론식 수업을 함으로써 같은 미대에 다니는 친구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일본 대학생들은 토론을 별로 하지 않는다.
이런 수업이 아니면 일상생활 속에서 토론을 하는 것은 좀처럼 볼 수 없다. 속내를 듣는 것이 정말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어려운데, 이런 수업에서 그나마 자신의 생각을 타인과 공유함으로써 조금은 사고를 말랑말랑하게 하는 것 같다.
기억에 남는 수업은 매주 특정 주제를 교수님이 정해오셔서 그에 대한 토론을 하는 수업이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왜 예술을 배워야 하는가.
예술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 사회는 예술이 필요한가.
이 포괄적이고도 막연한 질문은 듣는 순간에 헉하고 나도 모르게 신음을 낸다. 예술을 배우는 이유와 사회가 예술을 필요로 하는 가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있던가. 그래도 나름대로 다들 진지하게 저마다의 근거를 예시로 들며 의견을 공유한다. 이 질문들에 대해서는 교수님은 언제나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들은 오히려 졸업하고 난 뒤에 더 골똘히 생각해보게 된다.
미대에서 바라보던 사회와 실제 사회에 나와서 보는 사회는 정말 천지차이이며, 우리는 미술 울타리 안에서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복작복작했었구나.
사회는 생각보다 예술에 관심이 없다.
차갑고 쓰라리지만 현실에서는 예술에 중요 가치를 두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음을 느낀다.
오히려 선전을 위해 관심 있는 척을 할 뿐이다.
이용하고 버려지는 예술이 때로는 불쌍하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예술을 배운 이유는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도 길을 잃지 말라 등대를 켜주는 일이 아닐까.
미대에서 배우는 것들은 하나하나 보면 정말 별거 아닌 것 같이 느껴질 수 도 있다.
책을 보고 독학으로 배울 수 도 있는 것들이 있기도 하고 요즘 세상에 예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를 비롯한 매년 그토록 많은 미대 졸업생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예술로 밥 벌어먹고살지는 않더라도, 우리라도 예술을 잊지 않아야 할 의무를 갖고 있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