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지기의 읽는 일상
겨울의 끝자락에 감기에 걸렸습니다. 그래서인지 남은 겨울이 유난히 춥게 느껴졌고, 봄은 더디게 오는 것만 같았어요. 3월의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제 마음 가까이로 봄을 조금 끌어당겨 봅니다.
안녕하세요.
한쪽가게 책방지기 나경입니다.
00님은 봄을 맞으셨나요?
오랜 시간 공간을 운영하며 저에게는 여전히 재미있게 느껴지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손님들이 제가 밑줄을 그으며 읽은 책을 좋아해 주신다는 사실이에요. 책방을 연 이후에는 제가 읽은 책을 샘플로 두고 있는데, 가끔(사실은 생각보다 자주!) 그 책을 사고 싶다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리고는 꼭 물으세요. “책에 밑줄을 그으시는 이유가 있나요? 어떤 연필을 쓰세요?” 등등. 이처럼 책을 읽는 제 습관이나 도구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다 보니 자연스레 이 편지를 통해 한 번 이야기해보고 싶어졌어요.
책을 읽을 때 제가 준비하는 것은 연필과 마스킹 테이프입니다. 연필은 연하고 단단한 심을 좋아해요. 부드러운 연필을 선호하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연필이 번지는 걸 싫어하고 메모도 자주 하기 때문에 사각사각 써지는 연한심이 잘 맞더라고요. 지금 사용하고 있는 연필은 DIXON METRIC-1910-3H입니다. 흑심(@blackheart_pencil)에서 구입한 1970~1980년대 빈티지 연필인데 지금은 품절이더라고요. 그리고 CARAN D’ACHE SWISS WOOD HB도 자주 사용합니다. 나무 향이 좋아서 책을 읽다 보면 자꾸만 코에 가져가게 되는 귀여운 단점이 있어요.
테이프는 플래그 스티커 대신 사용해요. 예전에는 플래그 스티커를 썼는데 표시할 부분이 많아지면 지저분해지고 간혹 떨어지는 경우도 있어서 얇은 마스킹 테이프로 바꾸었습니다.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가벼운 수첩도 곁에 두고요. 음악은 가사가 없는 잔잔한 곡을 틀거나 아무것도 듣지 않습니다. 자주 듣는 앨범은 하루카 나카무라의 「Still Life」그리고 책방에서 소개하는 수관기피(@sggp.kr)의 음반들입니다. 책방의 필사 자리에 앉으신다면 오늘의 추천 음악도 꼭 들어보세요!
차나 커피를 좋아하는 컵에 담고 나면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합니다. 마음에 닿은 문장에는 밑줄을 긋고 특히 마음에 드는 표현에는 하트를 크게 또는 작게 그려 넣어요. 비밀은 아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을 만나면 욕을 적기도 해요. 최근 읽은 책에는 ‘미친 거 아니냐고요…’라는 문장을 남겼습니다. 재미있는 표현을 만나면 ‘ㅋㅋㅋ’도 적습니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 앞에는 별표를 더 오래 기억하고 싶은 곳에는 마스킹 테이프를 붙입니다. 가능하다면 책 표지와 어울리는 테이프를 골라 쓰는 것도 저의 작은 즐거움이에요.
이후엔 필사하고 싶은 문장과 책방 인스타그램에 공유할 문장을 골라요. 책을 다 읽으면 감상을 정리하고 책방에서 소개하고 싶은 책이라면 책 앞장에 짧은 소개 글도 덧붙입니다. 그렇게 책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다(!)’보면 책에는 밑줄과 삐뚤빼뚤한 저의 글씨, 다양한 색의 마스킹 테이프와 접힌 귀퉁이들이 남게 됩니다.
이전에는 어디서든 만날 수 있었던 책이 이 과정을 통해 온전히 나만의 책이 되는 것 같아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책을 다 읽고 난 뒤 밑줄 친 문장만 모아 다시 읽어보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다시 그 책을 꺼내 읽으며 밑줄을 확인하는 일도 참 좋아합니다.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내가 어떻게 닮았고 또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
직업병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저는 연필과 플래그 스티커 없이는 책을 읽지 못합니다. 그냥 하는 우스갯소리가 아니에요. 밑줄을 긋고 메모하며 읽지 않으면, 저에게 그 책은 읽어도 읽지 않은 책처럼 느껴지거든요. 책을 읽다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발견했을 때, 문학적으로 기발하거나 아름다운 표현이 눈에 띌 때, 관련 도서나 영화, 노래 등 참고할 만한 자료가 인용되어 있을 때 습관처럼 밑줄을 긋습니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데 필요한 정보가 있는 부분에는 시작과 끝에 < >로 표시를 하고요. 소설을 읽을 땐 주인공부터 한 번 등장하고 마는 엑스트라까지 모든 등장인물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칩니다. 등장인물의 나이와 직업, 습관이나 취향 같은 정보에도 밑줄로 살짝 표시를 해 두지요. 이렇다 보니 어쩔 땐 펼친 면의 모든 문장에 밑줄을 칠 때도 있습니다. 저의 독서는 완독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제가 읽은 책을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까지 포함이니까요. p.13
이 문장은 최근 『꼭 맞는 책』에서 만났습니다. 책방 사적인 서점(@sajeokinbookshop)을 운영하는 정지혜 작가님의 책이에요. ‘연필 없이는 책을 읽지 못한다’는 문장 옆에는 ‘ㅋㅋㅋ저도요!’라고 적었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까지 포함’이라는 마지막 문장엔 힘주어 밑줄을 그었습니다. 공감이 가는 글이었어요. 책을 좋아하던 시절에도 저는 열심이었지만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지금은 조금 더 진지하게 그리고 책임감 있게 책을 읽고 밑줄을 긋게 되었으니까요.
한쪽가게의 작은 서가는 제가 읽은 책 그리고 읽고 싶은 책들로 채워집니다. 인스타그램 피드에 소개하는 책들 중 읽지 않고 소개하는 책은 단 한 권도 없습니다. 소개하는 책이 모두에게 좋을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책 한 권을 사는 일이 이토록 쉽고 편한 시대에 굳이 책방을 찾아와 책을 사는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내어드릴 수 있는 책을 고르고 있다는 점만큼은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책들에 남겨진 저의 밑줄에는 그 마음까지 담겨 있다는 이야기를 오늘은 전하고 싶었습니다.
오늘도 저는 만날 문장과 이야기를 기대하며 연필을 준비하고 읽고 싶은 책을 골라 하루를 시작합니다.
00님의 읽는 일상도 궁금해집니다.
책을 읽을 때 어떤 준비물을 곁에 두시나요?
어떤 습관이 있으신가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5년 3월,
한쪽가게 책방지기 나경 드림
「나경의 편지」는 읽는 사람을 위한 작고 조용한 공간, 한쪽가게를 예약제로 이용해 주시는 분들께 드리는 저의 작은 마음입니다. 소박한 일상을 살아가며 마주한 생각과 마음, 책방의 이야기, 읽은 책 속 문장, 짧은 일기와 낙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