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리의 여백처럼 사용하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나경입니다.
해가 부쩍 짧아졌습니다.
요즘은 오후 다섯 시만 지나도 하늘이 금세 어두워지네요.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조금 더 바빠진 듯합니다. 예전에 동네에 사는 책 친구가 책방에 노란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면 안심이 된다고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날의 기억이 오래전 일이지만, 제 마음속에 여전히 한 장의 선명한 사진처럼 남아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후로는 누군가가 이 작고 조용한 공간의 불빛에서도 위로와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주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불을 켜고 끄는 작은 일에도 조금 더 마음을 담게 되었습니다.
최근 업무용 다이어리를 하나 새로 샀어요. 매일 비슷한 일을 반복하면서도 기록하지 않으면 자꾸만 잊게 되고, 아차- 하고 놓치는 일도 생기니까요. 물론 효율적인 어플들도 많지만 저는 여전히 손으로 직접 계획을 적고, 할 일 목록을 하나씩 지워가는 일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종이 다이어리는 저에게 꼭 필요한 도구예요.
제가 사용하는 다이어리에는 매달 마지막 페이지에 ‘그달을 돌아보는 여백’이 있습니다. 그 작은 여백 덕분에 올해는 비교적 규칙적으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되었어요. 그리고 알게 되었어요. 겉보기에 평범하게 흘러간 시간 속에서도 반짝이는 순간은 분명히 존재하고, 나 자신이 미웠던 날들 속에도 애쓴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걸요. 갑자기 제 자신이 기특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모든 시간을 의미 있게 해석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 한 달을 톺아보는 짧은 시간이 제 일상의 거름망이 되어주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11월이 되었어요. 저는 이 달을 다이어리의 월말 여백처럼 사용하고 싶어요. 10월은 이르고, 12월은 분명 지금보다 더 분주할 테니까요. 그래서 11월이 딱 알맞게 느껴집니다. 행복했던 일, 슬프고 화가 났던 일, 새로운 시간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일까지. 이 모든 것들을 천천히 돌아보며 차분히 정리하고 싶어요. 그리고 조금 더 맑아진 마음으로, 조금 더 씩씩하게 겨울을 향해 걸어가고 싶습니다.
최근에 밑줄을 그었던 문장에 기대어 11월의 인사를 전합니다.
작은 트럼펫 같은 능소화는 뚝뚝 얼굴 떨구고 대추와 무화과, 청포도와 대봉감 영그는 가을 한복판, 힘든 내색 않고 조용히 결실을 맺는 자연 앞에서 끝끝내 해내지 못할 장면들을 떠올린다. 어떤 날은 수채화 같고 어떤 날은 수묵화 같았어. 매일의 최선은 다르고, 날씨와 계절에 따라 쉬이 달라지는 컨디션에도 살기 위해 분주했던 작은 움직임들이 있었다. 때때로 찾아오는 권태와 좌절은 재채기처럼 자연스러운 것, 충분한 나에 이르지 못했더라도 화내거나 실망하지 말아야지. 하루가 커피잔 속 얼음처럼 사라진 것이 아님을, 나름의 최선이 있었음을 스스로는 안다. 얘, 그렇지만 너도 알다시피 가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시절은 아니지 않니. 눈앞에 있는 작은 일부터 정성스럽게 하자. [불안을 섬기는 세계에서는 확인까지가 사랑이라 | 박지이 | 문화다방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4년 11월, 한쪽가게 나경
「나경의 편지」는 읽는 사람을 위한 작고 조용한 공간, 한쪽가게를 예약제로 이용해 주시는 분들께 드리는 저의 작은 마음입니다. 소박한 일상을 살아가며 마주한 생각과 마음, 책방의 이야기, 읽은 책 속 문장, 짧은 일기와 낙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