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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여니vvv Sep 03. 2024

그렇게도 가족이 된다

세월에 스며든 사이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S. 플리니우스 <자연사>








   내가 처음 남자친구를 집에 소개했을 때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그 사람의 근본을 알아야 한다고.


   어머니는 딸의 평범한 외형과 너무도 다르게 다소 세련되어 보이는 남자친구가 내심 불안하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남자친구의 많은 것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어디에서 나고 자랐고, 가족은 어떻게 되며, 무엇을 하고 살았고, 지금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등등에 대하여 말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야 했던 고3 시절, 어느 날 어머니는 집에 어떤 아저씨를 데려왔다. 정말 뜬금없는 상황이었다. 어머니의 독단적인 선택으로 _ 모르는 아저씨가 갑자기 우리 집 안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푹 패인 주름을 가진 아저씨는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는 말이 없으셨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몇 잔의 술로 취하곤 하셨다. 취한 아저씨는 눈빛이 돌변해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밤새 혼자 중얼거리셨다.


  저 아저씨는 이기지도 못할 술을 왜 매일 마시는 걸까? 우리는 아저씨가 불편했다. 그리고 나는 아저씨가 이상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상한 건 어머니라 생각했다. 첫째, 왜 자식인 우리와 단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저 아저씨를 우리 집에 데려왔는가? 둘째, 얼굴에는 웃음기 하나 없는 _ 그래서 어머니를 전혀 행복하게 해 줄 것 같지 않은 저 아저씨가 어머니의 최선의 선택이 맞는가?



   만약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해야 할 사람이라면, 적어도 어머니에게만은 따뜻해야 한다고, 게다가 아버지에게 그렇게 데어놓고도 왜 또 술 먹는 사람을 만났는지? 우리는 모두 어머니의 의중을 단 한 톨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이상한 선택에 대해 반대해야 하는 이유만 넘쳐날 뿐이었다.  



   어머니의 이상한 선택에 대한 분노와 어머니를 이해해 보고 싶은 마음이 불꽃같이 싸움을 해댔다. 나의 작은 마음이 매시간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아저씨는 종종 나에게 뭔가를 말해주고 싶어 하셨다. 늦게 집에 귀가한 나를 불러 세워놓고, 뭐라고 한참을 중얼거렸다. 중간중간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라고는, “딸...!”이라는 어색한 단어뿐이었다. 이상한 상황에 어정쩡한 자세를 하고 앉은 나는 어머니를 간절히 쳐다보았다. 아저씨의 말을 용케도 알아듣는 어머니는 나에게 아저씨의 말을 전해주었다. 몇 마디 어렵게 대화를 하고 나면 나는 얼른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 방의 모든 공기가 숨 막히게 어색했다.




   하지만 내 마음 한편에는 아저씨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어쨌든 아저씨는 어머니가 데려 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_ 거부할 수 없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대화를 하다 보면 조금은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아빠와 딸이라는 관계를 새롭게 써볼 수 있지는 않을까. 하지만 그건 그나마 대화란 것이 가능할 때의 이야기였다. 평소의 아저씨는 무뚝뚝하셨고, 술 취한 아저씨는 이상했다. 그리고 아저씨는 대부분 취해 계셨기 때문에, 대화란 걸 하기에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 딸 왔어?”

“네, 아저씨 저 왔어요”




  오랜만에 고향에 들른 나를 데리고 집으로 가기 위해 터미널로 아저씨와 어머니가 마중을 나오셨다. 우리는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집에 가니 오빠 네와 동생 네가 미리 와 있었다. 한쪽에서는 고기를 굽고 밥상에는 각종 나물이며 생선구이, 회, 갈비 등 진수성찬이 펼쳐져 있었다. 정신없는 중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활기차게 들렸다. “아저씨가 너희들 온다고 아침부터 장을 몇 번이나 보러 갔는지…!”






  이제는 제법 가족 티가 나기 시작한 우리 가족 _ 우리들 사이로 암묵적인 평화가 흐르는 것 같았다.  



  돌이켜 보면 참 힘든 시간이었다. 이해의 영역을 벗어난 힘겨운 시작점 _ 그 영역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했고. 그러나 신기하게도 시간은 많은 것을 희석해 준다. 분노도, 원망도, 이상함 마저도. 그리고 좋은 소식도 가져다주었다. 아저씨는 점차 술을 줄이셨고, 어머니에게 고마움을 표하셨다. 우리 삼 남매의 분노도 점차 옅어졌고,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아저씨의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서로를 알아온 세월만큼 훌쩍 자란 마음들이 제각기 제 나름대로 크기를 키워 자리를 잡은 것 같았다.







   함께 살아가는  정말로 근본을 아는 것이 중요할까? 나는 어머니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저씨의 과거를 어머니가 종종 하시는 말로 어렴풋 짐작하곤 했지만 그것으로 현재의 아저씨를 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아저씨는 그저 내 앞에서 지금껏 함께 해온 아저씨뿐이었다. 그건 언제나 모양이 달랐고, 이상하고 볼품없어 보여도 상관이 없었다. 흘러가는 세월 속에 함께 흘러갈 뿐이었다.







    그리고 때로 가족은 그렇게도 되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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