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거나 말거나
우린 '책을 고른다'라고 하죠. 책장에 즐비하게 늘어선 책들 중에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선택'하는 거라고 말입니다. 이 생각에는 주인은 '나(사람)이고, 책은 '대상'이라는 관점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란 생각을 해봤어요. 그 많은 책 중에 왜 하필 그 책이 내 눈에 들어오고 내 손에 들리게 됐을까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사람들이 도서관에 들어옵니다. 도서관을 가득 채운 서가마다 수많은 책이 꽂혀 있어요. 사람들은 걸음을 옮겨 여기저기 훑어봅니다. 어린이는 어린이 코너로, 어른은 어른들 코너로, 청소년은 청소년 코너로. 그럴 거 같죠? 그런데 사실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찾는 책이 뚜렷이 없는 사람들은 그저 이리저리 발길을 옮기다가 한 곳에 머무릅니다. 무엇이 그 발길을 붙잡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유아, 유치, 초등, 청소년, 어른 할 거 없이 책 사이를 방황하다 정착할 자리를 찾게 되죠.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책을 뽑아 듭니다.
그 책은 뽑아 든 사람의 수준, 연령과도 상관없고, 어딘가에서 말하는 우수도서도 아니고, 깔끔하게 포장되거나 디자인되지도 않았고, 책 상태가 양호하지도 않으며, 누구의 눈에나 잘 띄는 그런 위치에 놓여 있는 것도 아니었답니다. 웬만하면 도서관에 있는 책 제목 정도는 꿰고 있는 저로서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책들을 들고 오실 때가 있죠.(아이든, 어른이든)
어쩔 땐, '이 책은 아마 많은 사람들이 대출해 가겠지'라며 내심 점찍어놓은 책들도 있는데, 희한하게도 도서관에서 두세 달이 지나서야 겨우 임자 만나 대출되는 책들도 있답니다. 하고많은 책 중에 왜 하필 그 책이 그 사람 눈에 띄었을까 생각해보면 '인연'이란 말을 붙여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서가에서 책을 꺼내 든 모습을 볼 때마다 제겐 뽑혀 나온 책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답니다. 마치 오랜 시간, 그 사람을 기다렸다는 듯.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책도 읽히고 싶은 사람이, 주목받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요. (이와 비슷한 상황을 묘사했던 판타지 동화도 있지만)
책과의 인연도 사람 인연 못지않게 중요하고 의미 있다는 생각, 그냥 해봤습니다.
그날, 한 달에 두 번 정도 들르시는 할머니께서(어르신은 장사를 하시느라 책 읽을 틈이 별로 없으시대요) 책 두 권을 대출하셨는데, 모두 청소년 코너에서 고르시더라고요. 그리곤 초등 고학년 정도 학생이 볼만한 동화책 한 권과 청소년 책을 대출하셨어요.
이상하다 싶어 여쭤봤더니,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으셔서'라고 하시더군요. 그 이유를 듣는 순간, 어릴 적에 잃어버렸던 소중한 물건을 다시 되찾은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런 이유에 적합한 많은 책들이 있겠지만 그 어르신께서 고르신 그 책이 그 바람을 꼭 이뤄졌으면 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왠지 그 책이 그분을 고르신 것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면서 말입니다.
* 이미지는 <도서관>(사라 스튜어트 글, 데이비드 스몰 그림, 지혜연 옮김/시공주니어)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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