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에서 깨가 쏟아지는 맛이란 어떤 것일까

by 은해


깨를 볶는다.

통깨나 깨소금을 마트에 가면 살 수 있지만 나는 늘 깨를 사서 집에서 직접 볶아 먹는다. 그래야 맛있다. 더구나 미리 찧어놓은 깨소금에서는 산패가 진행되었는지 약간의 찌든 내가 나는 경우가 있어서 집에서 깨를 직접 볶아서 깨소금은 그때그때 찧어서 먹는다. 깨는 시골에 사는 친척 분들이 더러 주시기도 하지만 그 깨 농사를 지을 때 무척 힘들었을 걸 생각하면 얻어오기가 미안하고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서 농협 하나로 마트에 가면 깨를 두어 봉지씩 사다가 냉동고에 쟁여두고 먹는다.

집에서 깨를 볶으면 온 집안에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산다는 일이 깨를 볶는 것처럼 그렇게 고소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생을 살면서 제일 깨가 쏟아지게 재미있었던 시간은 언제였을까.

사람들은 흔히 신혼 시절을 이야기 할 때 ‘깨를 볶는다.’ ‘고소한 냄새가 여기까지 나더라.’ 등의 말을 한다. 물론 대부분의 신혼부부들이 알콩달콩 깨를 볶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 정도로 고소하고 달콤할 거라는 부러움과 시샘이 담겨 있는 말이며 나도 신혼 시절에 그런 말을 많이 들어보았다.

그런데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되돌아보니 깨가 쏟아진다는 그 신혼시절보다 더 소중하고,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고소했다 싶은 시간은 아이가 태어나 힘들게 키웠던 그 시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쪼그마한 손을 꼼지락꼼지락하며 엄마 손가락을 꼬옥 쥐어 주고,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이유식을 받아먹고, 눈을 맞추고 이름을 불러주면 방긋방긋 웃고, 어느 날부터 쫑알쫑알 옹알이를 하며 엄마 말에 장단을 맞추어 주던 고런 순간들이 있었다.


바로 그런 순간들을 만나기 위해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기를 키우던 그 시간은 정말 깨가 쏟아지게 재미있었다.

하루를 키우면 하루만큼 자라고 한 달을 키우면 한 달의 수고만큼 자란다. 어느 날 혼자 몸을 뒤집고, 어느 날은 혼자 기어가고, 어느 날은 혼자 일어서고 또 어느 날은 혼자 발걸음을 떼어놓는다. 아들이 11개월 10일 만에 혼자 걷기 시작했을 때는 정말 기뻤다. 그러다가 어느 날 ‘엄마!’하고 나를 부르면 그동안의 고생을 다 잊어버리고도 남는다. 내가 해서 떠먹여 준 이유식이나 밥을 받아먹고 아이가 누렇고 빛나는 황금똥을 누면 어찌 그렇게 대견한지 ‘어머, 이리 좀 와보세요. 이 것 좀 봐요.’하며 옆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같이 보자고 한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자기 새끼를 키우는 일은 그렇게 감동적이고 깨가 쏟아지게 재미있는 일이다.

물론 한 생명을 키워낸다는 것은 힘들고 고단한 일이다.

더구나 요즘처럼 일과 임신, 육아를 모두 감당해야하는 젊은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아직까지도 이 사회가 그리고 남성들이 출산과 육아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주지 않는 분위기에서 여성에게 더욱 힘든 일인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성들이 출산과 육아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여성으로서 한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여성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 남자들은 절대 할 수 없는 우리 여성들만의 특권이다.

우리 어머니들 세대도 그랬고 우리 세대 즉 지금의 어머니들도 자기 스스로의 존재감을 찾을 수 있고 자신의 이름을 드러낼 수 있는 길을 걷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이가 들고 보면 그 것에 대해 후회가 많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요즘의 젊은 여성들이 지나치게 자기 일에 대한 가치를 추구하는데 매달리다가 또 다른 중요한 것을 놓치고 후회하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여성에게만 주어진 그 특권을 놓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물론 가정과 우리 사회와 국가가 여성의 출산과 육아에 대한 책임을 나누어 져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오른 쪽으로 가버린 공이 못마땅해서 이번에는 절대 오른 쪽으로 살지 않을 거라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공을 치다가 왼 쪽으로 치우친 공을 치고 후회할까봐 걱정스럽다.

오른 쪽으로 간 잘못 친 공은 왼 쪽이 아니라 똑바로 가도록 쳐야하는 것이다.

이 땅의 젊은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여성이라면 여성만이 누릴 수 있는,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고 키우면서 느낄 수 있는 깨가 쏟아지게 고소한 그 맛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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