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살에 어머니와 무말랭이가 나란히 잘 마르고 있다

by 은해


무말랭이처럼 쪼그라든 어머니가 가을무를 썰어 넌다.

꼬들꼬들하게 말려서 무쳐놓으면 큰아들도 잘 먹고 손녀들도 좋아한다며 무를 썰어 말린다. 무를 약간은 도톰하게 썰어야 마른 후에도 식감이 살아있다고 알맞은 크기로 무를 자른다. 언젠가 동네를 돌던 트럭 장수에게 계란 한 판을 사고 공짜로 얻어둔 플라스틱 채반에다 썰어놓은 무를 날라리 펼쳐 넌다.

남향 아파트의 베란다로 농익은 가을 햇살이 내려앉는다.

무를 썰어 너는 이는 어머니지만 무말랭이를 말려 주는 것은 실은 햇살이다. 무말랭이를 말리는 것은 실은 시나브로 흘러가는 시간이다. 어머니는 다만 무를 썰어서 채반에 널었을 뿐이고 햇살이 할 일을 다 하도록, 시간이 잘 흘러가도록 기다리는 일을 할 뿐이다.

이제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생생하던 무는 쪼글쪼글 말라 비틀어져 무말랭이의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 어머니는 그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기실 시간은 굳이 기다리지 않아도 저 혼자서 흘러가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머니도 무말랭이처럼 쪼그라들었나보다.


여중에 다닐 때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오셨다. 사실은 학교 수업이 끝난 후 내가 선생님을 모시고 예배당골에 있던 우리 집 마당으로 선생님과 함께 들어섰다. 마당 가 작은 화단에는 백일홍 몇 송이가 수줍은 듯 피어있었고 마침 어머니는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하얀 색의 긴 앞치마를 두르고 환하게 웃으며 부엌에서 나왔다. 그 당시 유행하던 홈드레스를 입고 흰색 앞치마를 두른 어머니의 모습이 내가 보기에도 참 아름다워서 나는 속으로 자랑스러웠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선생님에게 보여드릴 수 있어서 뿌듯했다.

그렇게 곱던 어머니가 수 십 번의 가을 햇살을 받고 살면서 세월이 흘러 이제는 꼬들꼬들, 쪼글쪼글 말라버렸다. 산다는 것이 도톰 도톰하게 썰어 넌 무가 무말랭이가 되듯 그렇게 말라버리는 것 인줄 그 때는 몰랐다.


따사로운 가을햇살 아래 어머니와 무말랭이가 나란히 잘 마르고 있다.

우리는 올 해도 무말랭이처럼 쪼그라든 어머니가 무쳐준 무말랭이 무침을 먹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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