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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해 Mar 06. 2021

성스러운 한 끼

맛과 믿음의 음식 인문학

 경향신문 문화부 종교담당 기자를 하면서 종교와 음식을 엮어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는 저자 박경은은 책의 서문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저마다 고유한 존재의 본질과 세계를 만들어가는 행위’라고 말한다.


 저자는 언젠가 빵집에서 주인에게 양심도 없이 햄 한 장도 들어가 있지 않은 이런 엉터리 샌드위치를 팔았다며 항의하는 사람을 보게 되었는데 주인은 그쪽 코너는 할랄(halal) 메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냐고 항변하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모슬렘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며 할랄 메뉴는 그들의 규정에 맞게 만들어진 음식이니 돼지고기가 재료인 햄이 들어가 있지 않다는 뜻이라는 걸 그 손님은 몰랐던 것이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하며 오랫동안 정신문화를 지배해온 종교는 음식문화의 요소를 구성하는 기초다. 상대의 식문화에 대한 낯섦이 상대의 세계를 거부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 책이 서로의 낯섦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저자의 바램이 말해주듯이 이 책에는 종교와 관련된 음식 이야기가 많다.     


 ‘죽’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온 의미 있고 유서 깊은 음식이다.

 곡식을 수확해서 물을 넣고 끓인 원초적 음식 역시 ‘죽’의 일종이다. 불교에서 ‘죽‘은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보리수 아래에서 정진하던 싯다르타는 6년간 고행을 하며 피골이 상접한 상태였다. 마을에 살던 젊은 여성 수자타는 우유로 끓인 ‘유미죽’을 공양했다. 이를 먹고 기운을 차린 싯다르타는 비로소 깨달음에 이른다. ‘유미죽’은 물에다 곡물가루를 풀어 연근 즙과 함께 우유를 넣어 만든 죽이다. 싯다르타를 깨달음에 이르게 했던 이 죽은 이후 줄곧 사찰음식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불교에서는 왜 오신채(五辛菜)를 금하는지 궁금하다.

 불교에서 오신채는 다섯 가지 맵고 자극성이 강한 음식을 말한다. 마늘과 파, 달래, 부추 그리고 흥거(양파)다. 이 다섯 가지는 따뜻한 성질을 갖고 있어서 몸에 양기를 불어 넣어주기 때문에 수행에 방해가 되어 금하는 것이다. 마늘은 대표적인 정력 식품으로 주목받아왔고 부추는 ‘기양초’ ‘파옥초’ ‘정구지’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양기를 돋우는 식품이다. ‘초벌부추는 사위도 주지 않고 남편에게만 먹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흥거가 진화한 형태가 양파인데 프랑스의 호텔에서는 신혼부부에게 양파수프를 제공한다고 한다. 오신채 금지를 언급한 불교의 경전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수능엄경>은 ‘오신채를 익혀 먹으면 음란한 마음이 생겨나고, 날것으로 먹으면 세 가지 독심이 일어난다.’라고 했다.     

 

 가톨릭 신자는 왜 금요일에 물고기를 먹는가.

 마이클 폴리가 쓴 책 제목이기도 하다. 고대 로마에서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된 뒤 중세 문화는 기독교가 지배했다. 식생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금요일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성 금요일’로 지켜져 왔다. 그래서 로마교회는 매주 금요일을 속죄와 참회의 날로 정하고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다. 그 규정은 예수의 부활 전 40일 간을 일컫는 사순절 기간도 마찬가지로 지켜진다. 예수가 피 흘리고 죽은 날에 고기를 먹지 않도록 한 것은 신학적 타당성을 얻었다. 당시 사람들은 붉은색 살코기와 고기의 지방이 사람을 흥분시키고 환각 상태로까지 빠지게 한다고 여겼다. 게다가 고기 대신 다 같이 소박한 생선을 먹는 기간 동안에는 그나마 사회 계층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이 신 앞에 평등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속죄와 경건의 시기를 보내는 기독교 신자가 즐겨 먹었던 물고기는 ‘청어와 대구’ 두 가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금요일에 붉은색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가톨릭의 오랜 전통이었다. 1962년 미국의 한 맥도날드 매장에서, 금요일의 매출 하락을 타개하기 위해 개발한 음식이 ‘피시버거’의 출발이다.     


 도대체 버터와 종교개혁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15~16세기 유럽에서 버터는 아주 인기 있는 식품이었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교회가 지배하던 당시, 사람들은 자유롭게 버터를 먹을 수 없었다. 교회는 사람들이 버터 먹는 것을 제한했다. 고기나 유제품이 성욕을 부추긴다고 생각해서 사순절이나 금식일에 동물성 지방을 섭취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금식기간에 동물성 식품의 섭취를 금지한 것은 독신 서약을 지키는 수행자를 위해서였는데 중세에는 일반 신자도 지켜야할 의무로 확대됐다. 문제는 그 규정을 지켜야하는 기간이 일 년의 절반 가까이나 된다는 것이다. 남부 유럽인들은 올리브 오일이나 생선을 많이 먹기 때문에 덜했지만 육류와 버터, 달걀 등을 주된 식량으로 삼았던 프랑스나 독일 등 중북부 유럽인에게 로마 가톨릭교회의 이 같은 처사는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금식 기간에 버터마저 금한다면 사실상 먹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셈이었다.

 금식 기간에 정해진 규정을 어길 경우 가난한 신자는 벌금을 내거나 채찍을 맞았고 투옥되는 일까지 있었다. 하지만 부자는 특혜를 누렸는데 돈을 주고 버터를 섭취할 수 있는 권리를 산 것이다. 교회는 버터 섭취권을 판돈으로 화려한 건물을 짓고 보수도 했다. 이 때 지어진 대표적 건물이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 있는 루앙 대성당의 첨탑이다. 그래서 이 성당의 별명이 ‘버터 타워’라 불린다고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버터를 주로 생산하고 먹던 북유럽 국가와 16세기 종교개혁기에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이탈한 나라가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지금도 올리브오일을 많이 먹는 이탈리아나 스페인, 포르투갈 등 남부 유럽은 가톨릭 교세가 강하고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등 버터를 많이 먹는 지역은 개신교 세가 강하다.     


 인도의 자이나교는 불살생과 극도의 고행을 강조하는데, 땅속의 벌레를 죽일지 모른다는 이유로 농사도 짓지 않을 정도이고 수확과정에서 벌레를 죽일 수 있다는 이유로 감자나 양파 같은 뿌리채소도 먹지 않는다. 게다가 벌레가 있을 가능성이 많은 채소도 금지 품목에 포함되는데 이 ‘가능성’의 대표적인 채소가 브로콜리다.

 유제품도 섭취하지 않는 완전 체식주의자를 ‘비건 vegan’이라고 하는데 자이나교는 그것을 뛰어넘는 궁극의 채식주의를 택한다.

 살생의 위험 때문에 농사를 짓지 않는 자이나교 신자는 주로 상업, 금융업 등의 분야에 종사한다. 이 때문에 막강한 경제력을 쌓았고, 오늘날 인도 경제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알 법한 성경의 내용 중에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아넘겼다는 야곱과 에서의 에피소드가 있다. 에서가 허기진 채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침 동생 야곱은 팥죽을 끓이고 있었다. 그것을 본 에서가 ‘배가 고파 죽겠다’라면서 그 죽을 달라고 한다. 그러자 영악한 동생 야곱은 ‘형이 가진 맏아들의 권리를 나에게 팔면 죽을 주겠다’라고 제안하고 에서는 두 번 생각지도 않고 곧바로 맏아들의 권리를 넘겨버린다는 이야기다.

 한글 성경에는 팥죽으로 번역된 이 음식이 영어성경에는 ‘렌틸 스튜 lentil stew’라고 되어 있다. 즉 렌틸콩으로 끓인 죽이나 수프쯤 되는 것이다. 우리식 팥죽은 아니지만 콩으로 쑨 죽이다. 딱히 엄청나게 맛있는 요리였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너무나 허기졌던 에서는 눈앞의 욕망에만 충실했고 자신이 가진 권리가 얼마나 크고 귀한 것인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렌틸콩은 토지가 비옥했던 나일강 인근의 이집트 땅에서 많이 재배된 작물인데 요즘은 우리나라 마트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고 미디어를 통해 수퍼 푸드로 소개되면서 인기를 끌고 있기도 하다.     


 돼지고기를 금기시 하는 것은 유대교뿐 아니라 이슬람교도 그렇다.

 돼지가 부정하다는 것인데, 왜 그럴까? 모세5경에 속하는 구약성경 레위기와 신명기에는 먹을 수 있는 동물과 금지되는 동물이 자세히 언급되는데 이런 내용이 있다.

 ‘돼지는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진 쪽발이기는 하지만, 새김질을 하지 않으므로 너희에게는 부정한 것이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돼지는 더럽고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배설물이 뒤범벅된 진흙탕에 뒹구는 모습이 불결할 뿐 아니라 불쾌감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돼지는 체온조절을 위해 진흙탕에 구르는 것일 뿐, 넓은 장소에 살면 눕는 곳을 철저히 구분하는 깨끗한 동물이라고 한다.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문화의 수수께끼>>에서 돼지를 금기시하는 이유에 대해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더럽다거나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환경적, 경제적 이유를 꼽는다. 서아시아 지역에서 돼지는 유목에 적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인간과 같은 것을 먹기 때문에 경쟁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소나 양처럼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은 인간이 먹어야 할 곡물을 나눠 먹지 않고도 고기와 젖, 노동력을 제공하지만, 돼지는 이 같은 이익을 제공하지 못할 뿐 아니라 서아시아의 기후와 생태에도 견뎌내지 못했던 것이다. 즉 인간과 돼지의 조화로운 공존을 위협할 수밖에 없는 기후적, 생태적 조건에서 성경과 쿠란이 돼지를 정죄했다는 것이다.


 유대교는 음식에 대해 육류를 도살하는 법과 먹는 방법, 섭취가 허용되거나 금지되는 음식, 먹는 시간 등 식문화에 관한 전반적인 것을 세부적으로 규정하는데, 이 같은 규정을 준수한 음식을 ‘코셰르 kasher’라고 한다. 유대교 율법에 따르면 고기와 유제품을 함께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유대인에게 치즈버거는 용납될 수 없는 메뉴다. 당연히 이스라엘의 맥도날드나 버거킹에서는 치즈버거를 팔지 않는다.

 코셰르 식품은 율법에 따른 엄격한 공정을 거치기에 위생 면에서 깐깐하고 까다로운, 그래서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이라는 신뢰가 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종교와 상관없이 많은 소비자가 코셰르를 선호하고 있다. 모슬렘의 ‘할랄 halal’도 음식에 까다로운 규정을 적용하지만, 코셰르는 할랄의 기준을 충족할 뿐 아니라 그보다 더 까다롭다. 식품 관련 전문 연구기관은 저마다 코셰르 식품 시장이 앞으로도 꾸준히 성장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렇다면 ‘식욕’을 대하는 종교의 자세는 어떠한가?

 우리나라 군에서는 ‘초코파이 전도’라는 말과 함께 초코파이와 얽힌 일화가 많이  있다. 나눠주는 초코파이 개수에 따라 병사들이 찾아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원초적 욕구인 식욕을 제약받는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달콤한 먹을거리, 맛있는 음식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그래서 이를 전도나 포교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은 어디서나 비슷하다. 외국의 교도소에서 벌어지는 양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특별한 기념일에 종교인들이 찾아와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일이 많은데, 유대교 명절이 다가올 즈음이면 재소자들이 모두 유대인이 되고 싶어 했고, 이슬람의 라마단 시기가 되면 이슬람 지도자들이 찾아와 연회를 베풀기 때문에 그럴 때는 모두 모슬렘이 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원초적 욕구인 식욕을 제약받는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달콤한 먹을거리, 맛있는 음식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약한 본능을 이용하는 것이 포교 활동의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도 있겠지만 순수하게 베풀고 나눈다는 정신의 실천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는 위에서 소개한 내용 말고도 너무나도 로마적인 슬픈 아티초크 이야기, 믿음의 증거가 되었던 아라비아의 달콤한 디저트 이야기, 가톨릭과 정교회의 최후의 만찬 빵 논쟁, 스님을 웃게 한다고 하여 승소僧笑라는 별칭이 있는 절의 국수 이야기, 탐스러운 붉은 색과 풍부한 과즙으로 음욕을 자극한다고 여겨 창세기에 나오는 금단의 열매로 오해받았던 토마토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17세기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을 이끌었던 크롬웰은 아예 토마토 재배를 금지했다는 대목에서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너무도 붉고 예쁜 토마토에게 무슨 죄가 있겠으며 ‘식욕’과 함께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 가운데 하나인 ‘성욕’은 또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다만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해서는 안 되는 일, 즉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 등 불법적인 행동을 했을 때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닐까.     


 여러 문화권에서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먹는 것까지 제한하거나 어떤 식품 또는 그 식품을 먹는 사람에 대하여 ‘유죄’라고 단정한 지난 세대의 사람들은 이미 과거의 일이니 어쩔 수 없다거나 이해하거나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와 음식과의 관계에서 오늘날 까지도 경전에 쓰여 있는 내용을 글자 그대로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 신자들을 어떤 금지규정에 묶어놓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가톨릭 신자이지만 금요일에 버젓이 고기를 구워먹는 일에 개의치 않는다. 주말(weekend)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에, 일주일 동안 일찍 출근하느라 고단했던 식구들이 맛있는 저녁식탁을 기대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금요일 저녁에 맛있는 걸 먹지 않으면 언제 먹을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막무가내 ‘날나리’ 신자인 것은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사랑’이라는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서 가끔은 애쓰고 있다는 것을 밝혀둔다.

 

 이 책을 통해서 먹는 다는 일이 얼마나 정신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일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두 가지가 서로 연계되어서 우리의 음식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어떤 식재료나 음식도 부정하거나 나쁜 것일 수 없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음식이 아주 소중한 것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한 권의 책 속에 재미있고 유익하고 흥미로운 많은 이야기들을 소개해준 박경은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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