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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해 Mar 12. 2021

82년생 김지영

지영이 얘기 좀 들어보실래요?


 원래 그랬으니까.

 어린 김지영은 남동생이 특별대우를 받는다거나 그래서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가끔 뭔가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자신이 누나니까 양보하는 것이라고 상황을 합리화하는데 익숙했다. 갓 지은 따뜻한 밥을 아버지, 남동생, 할머니 순서로 퍼 담는 것이 당연했고, 모양이 온전한 두부와 만두와 동그랑땡이 아들인 남동생 입에 들어가는 동안 김지영은 부서진 조각을 먹는 것이 당연했다.      


 우리 집도 원래 그랬다.

 연탄불에 맛있게 구운 자반고등어의 가운데 토막은 아버지와 남동생이 겸상하는 밥상에 올려주고 어머니와 나는 고등어 대가리를 먹었다. 고등어 대가리에 붙은 살이 맛있기는 했지만 양이 적으니까 대가리까지 쪽쪽 빨아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원기소’라고 하는 영양제가 있었는데 어른들이 그 통에 줄을 매어 남동생 목에 걸어주었다. 아들인 남동생은 언제라도 그 고소한 원기소를 꺼내 먹으며 놀았고 나는 어쩌다 한 번씩 남동생에게 몇 알씩 얻어먹었다.     

 그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아들과 딸을 대놓고 차별한 것이다. 그 차별의 상황을 자각하고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차별은 언니와 김지영에 이어 세 번째로 임신한 태아가 딸이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남편으로부터 ‘재수 없는 소리’라는 말을 들은 지영의 어머니가 낙태를 선택하는 일에서 정점을 찍는다.

 ‘딸’이라는 이유로 태어나 보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한 생명들을 기억하는 사회를 꿈꾼다.     


 학교에서 번호를 매길 때도 남자가 1번이고, 남자가 시작이고 남자가 먼저인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 복장 규정도 여학생들에게 더 빡빡했고, 남자 교사들 중에는 다 큰 여자아이들의 엉덩이를 두드리거나 브래지어 끈이 지나가는 등을 툭툭 치는 경우가 있었다. 조심하라고, 옷을 잘 챙겨 입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라고, 위험한 길, 위험한 시간 그리고 위험한 사람은 알아서 피하라는 말을 들었다. 못 알아보고 못 피한 사람이 잘못이라고 지영이와 나는 그렇게 배우고 컸다. 그런 말을 들으면 무언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1999년에 남녀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이 제정됐고, 2001년에 여성부가 출범했고, 2005년에는 남성 중심으로 가계를 승계해 오던 호주제가 폐지되었다. 많은 여성들이 남녀 차별이 부당하다는 인식을 하게 됨으로써 법과 제도가 바뀌었고, 또 법과 제도가 바뀜으로써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이 많이 바뀌게 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이면 ‘여자’라는 꼬리표가 슬그머니 튀어나와 시선을 가리고, 뻗은 손을 붙잡고, 힘차게 내딛던 발걸음을 돌려놓았다고 작가는 하소연한다.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회사에서도 너무 부담스러워한다는 말을 대놓고 들어야 했고, 김지영은 안개가 잔뜩 낀 좁은 골목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면접장에 질문자로 나온 중년의 남자 이사가 거래처 상사가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한다면 어떻게 대처하겠느냐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던 일을 집에 돌아와 곱씹으면서는 자다가도 억울하고 열이 올라서 이불을 몇 번이나 걷어찼다.     

 김지영이 어렵게 입사한 회사에서도 업무능력과 무관하게 장기 프로젝트에는 여사원을 잘 포함시키지 않았다. 회사 대표의 생각이 업무 강도와 특성상 일과 결혼 생활, 특히 육아를 병행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여직원들을 오래갈 동료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김지영은 미로 한가운데 서 있는 기분이었고, 성실하고 차분하게 출구를 찾고 있는데 애초부터 출구가 없었던 것은 아닌지 갈등한다.     


 결혼 후에는 현실적으로 출산과 육아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원치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아직도 많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특히 아이가 있는 여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등의 제도를 통해서 이런 문제를 지원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멀다. 아이들은 키우는 일을 한 여성 개인의 일 또는 한 가정의 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와 국가가 함께 책임지고 해야 할 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김지영도 결혼 후에 출산을 하고 아이를 키우게 되는데 아이를 남의 손에 맡겨 키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결국 부부 중 한 사람이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돌보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그 한 사람은 당연히 여자이고 엄마인 김지영이었다.

 남편 정대현의 연봉이 더 많기도 했지만 우리 사회의 시각이 남자들은 ‘가장’이라며 중요한 경제의 주체로 보는 반면, 여성의 소득활동은 용돈벌이 정도로 여기는 풍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은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 난이도를 후려 깎고, 때로는 ‘살림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도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출산과 육아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도 그와 비슷하다. 하나의 생명을 낳고 키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며, 이 세상에 모성애보다 더 아름답고 위대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느냐며 입이 마르게 추켜세우다가도 임신한 여성에 대해 또는 아이를 안고 외출한 여성에 대해 우리 사회가 충분히 배려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김지영이 재취업을 위해서 베이비시터를 알아보다가 난관에 부딪히게 되자 남편인 정대현이 육아휴직을 고려해보겠다고 한다. 그 말을 전해들은 시어머니는 펄쩍 뛰며 반대하고 며느리인 김지영에게 제정신이냐고 책망한다.


 소설에서 보이는 김지영의 남편 정대현은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으며, 아내에 대한 배려심을 가진 좋은 사람으로 그려진다. 혹자는 그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남편도 그 정도면 착하고 친정엄마도 아이를 봐줄 테니 재취업하라며 지원해 주겠다고 하고 뭐가 문제여서 김지영이 빙의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소설의 방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본다.

 만약 김지영의 남편이 아주 나쁜 사람이어서 김지영이 아프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그저 불행한 개인사일 수 있다. 하지만 남편도 착하고 친정엄마 같은 지원군이 있는데도 김지영이 아프고 불행한 이유를 우리는 찾아보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사회구조적으로 여성을 차별하고 있거나 옥죄고 있는 문제들이 있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한다.     


 최근에 미국 연방 대법원의 대법관이었던 루스 베이더 린즈버그가 사망했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러시아계 유대인이었던 그녀는 진보와 페미니즘의 아이콘이었다.  그녀가 하버드대 로스쿨에 다닐 당시에 ‘남자들이 앉을 자리를 빼앗았다.’는 비난을 들었고, ‘여성은 도서관 열람실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경비원에게 막혀 도서관을 이용하지 못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루스 배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가 만들어졌는데 영화 속 그녀는 “여성에게 특혜를 달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 목을 밟은 발을 치워달라는 것뿐이다.”라고 말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불공평해.”

 매번 번호 순서대로 밥을 받아서 먹기 때문에 번호가 뒤 번호인 여학생들이 늦을 수밖에 없는데도 늦게 먹는다고 혼을 내던 선생님을 향해 지영의 학교 친구가 한 말이다. 그렇다.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이 소설은 여성과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어울려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사회가 남자와 여자에게 각각 얼마나 공정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묻고 있는 책이다.      

 ‘공정’이라는 말이 이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다.

 남성이냐 여성이냐 하는 성에 따른 차별, 외모에 따른 차별, 출신 지역에 따른 차별,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종교에 따른 차별, 피부 색깔에 따른 차별 등등 이 세상에는 온갖 차별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차별이 나쁜 이유는 차별을 받는 사람이 억울하고 불행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차별에 따른 이득을 보는 것으로 여겨지는 상대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지영이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그녀의 남편인 정대현도 행복할 수 없는 것이고, 억울하고 부당하다고 느끼는 사회구성원이 존재하는 한 함께 살아가야 하는 나머지 구성원들도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차별이 없는 세상을 이야기하고 꿈꾸어 온 지도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억울하다고, 부당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공정’이라는 것이 말은 쉽지만 실행하기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언젠가 이사를 했을 때의 일이 기억난다. 크고 무거운 짐들을 제자리를 찾아서 놓고 나면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 거실 벽에 그림이나 사진 액자를 거는 일이다. 남편이 콘크리트 벽에다 못을 박고 액자를 걸어본다. 그런데 걸어두고 뒤로 조금 물러나서 바라보면 어느 한 쪽이 기울어져 삐딱한 경우가 많다. 그러면 내가 멀리서 봐 줄 테니까 액자를 똑바로 해보라고 한다. ‘오른쪽을 조금 내려봐.’ ‘아니, 아니, 이번엔 왼쪽이 너무 올라갔잖아. 왼쪽을 조금 내려봐.’ ‘아니, 이번엔 다시 오른 쪽을 조금 내려봐요.’하면서 균형을 맞추곤 했었다. 그렇게 몇 번이고 오른쪽과 왼쪽을 올렸다 내렸다 하다가 액자가 똑바로 걸어지면 그제야 만족한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공정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뭔가 억울하다고 느끼는 지영이도 없어야 하고, 또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대현이도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남성성과 여성성이 모두 존중받는 공정한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작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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