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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해 Apr 23. 2021

장미의 이름

유용한 진리라고 하는 것은 언젠가는 버려야 할 연장과 같은 것이다


 언젠가 꼭 읽어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사서 책꽂이에 꽂아두었던 책이 있었다. 상 하 권으로 이루어진 900쪽이 넘는 대단히 긴 소설이다.      


 바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다.     


 중세 유럽 (1300년경)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서 벌어진 여러 건의 살인사건을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나갔다. 작가는 그 놀랍고도 무서운 사건들을 담담히 묘사해 나가면서 그 사이사이에 중세시대의 교회가 어떤 모습이었고, 스스로 어떤 모순에 빠져있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저명한 기호학자였고, 뛰어난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래 최고의 르네상스적 인물이라는 칭호를 얻었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이니 아무리 길어도 끝까지 읽다 보면 반드시 빛나는 문장 하나쯤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읽었다.

 나는 마침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내가 기다리던 그 문장을 만났다.     


우리가 상상하는 질서란 그물, 아니면 사다리와 같은 것이다. 목적을 지닌 질서이지. 그러나 고기를 잡으면 그물을 버리고, 높은 데 이르면 사다리를 버려야 한다. 쓸모 있기는 했지만 그 자체에는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되니깐 말이다.”     


그래, 유용한 진리라고 하는 것은 언젠가는 버려야 할 연장과 같은 것이다.”     

 

 이 소설의 화자인 멜크 수도원 출신의 베네딕트회 수도회 수련사인 아드소와 늘 함께 다니며 살인사건의 범인을 추리해 나가는 중심인물,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도사인 윌리엄 수도사의 말이다.     

 

 나는 바로 이 대목을 읽으면서 가슴이 탁 트이는 것을 느꼈다.

 나는 바로 그 시점에서 자유를 느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종교적 도그마도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며 진리에 다다르기 위한 도구이자 연장일 뿐임을 작가의 말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암흑의 시기라고 불리는 중세 유럽은 말할 것도 없으며, 심지어 지금 여기에서도 우리는 그 그물이나 사다리를 붙잡고 씨름하는 종교조직이나 그에 속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아주 배타적인 태도로 자기의 논리나 교리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자기가 속한 종교의 사상만이 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이 세상에 많은 사다리 중에 오직 내가 가진 사다리만이 진짜 사다리라고 우기는 중인 것이다.      


 이 작품은 중세의 종교소설로도 가지는 의미가 크지만 미스터리 소설로서의 재미도 있다. 아델모, 베난티오, 베렝가리오, 세베리노 등이 죽어가는 상황이 독자로 하여금 그 일이 어떻게 그리고 왜 일어났는지 계속해서 궁금증을 가지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이 소설의 화자인 아드소의 스승이자 이야기의 중심축의 역할을 하는 윌리엄 수도사에 대하여 자꾸만 마음이 가는 것을 멈출 수 없다. 그는 작가인 움베르토 에코를 대신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 또는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하는 중심인물인 것이다.


 이 소설이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적이 있지만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드러난 그에 대한 묘사로 그저 짐작할 뿐인데 그는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마다 항상 민첩하게 움직이는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래서 아드소가 항상 믿고 따르는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사람이다. 그는 꽃피는 봄을 쉰 번이나 본 분이어서 당시 이미 노경이었다고 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윌리엄 수도사를 통해서 움베르토 에코를 만나고 윌리엄 수도사의 말을 읽고 작가 움베르토 에코의 음성을 듣는 듯했다.


 수도원 마당에서 윌리엄 수도사가 어떤 풀잎 같은 것을 씹고 있는 것을 보고 아드소가 그게 도대체 무슨 풀이냐고 물었을 때 사부인 윌리엄 수도사가 웃으면서 ‘참 기독교인이라면 상대가 이교도들이라고 하더라도 배울 것을 배워야 마땅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하고, 맛보게 해달라고 조르는 아드소에게 ‘늙은 프란체스코 수도사에게 이로운 풀이라고 해서 베네딕트 수련사에게 반드시 이로울 리는 없다’고 대답한다.

 수도원에서, 참혹하게 살해되는 수도사들의 시체가 늘어 갈 때도 윌리엄 수도사가 그렇게 한가하게 원고만 뒤적거리곤 하는 것을 보고 아드소가 그런 태도는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물었을 때도 ‘우주라고 하는 것이 아름다운 까닭은, 다양한 가운데에도 통일된 하나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통일된 가운데에서도 다양하기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마치 선문답처럼 들리는 이런 식의 대화 속에서 나는 언제나 어떤 사안의 본질을 바라보는 태도와 마음을 배울 수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사건이나 현상만을 가지고 매달릴 것이 아니라 그 일의 본질을 바라볼 줄 아는 마음과 안목을 기르는 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라는 것을 생각한다.

 

그것은 또한 글을 쓴다고 하는 작가들이 가져야 할 덕목이기도 함은 말할 필요가 없다.      


 어느 날 본관 옆 벼랑 아래에서 염소치기에 의해서 시체가 발견되었다. 장서관 원고를 아름다운 장식으로 꾸미던, 젊지만 유능한 채식 장인 수도사인 아델모였다. 시체는 표면만 녹아 가볍게 언 눈에 묻힌 채 가파른 벼랑 아래에서 발견되었는데, 떨어지면서 바위에 부딪혔는지, 갈가리 찢겨 있었다고 했다. 수도원 원장은 조심스럽게 며칠 전에 일어난, 수도사들의 공부를 크게 방해하고 있는 예사롭지 않은 이 사건을 윌리엄 수도사에게 설명하고, 아무쪼록 윌리엄 수도사가 이 고통스러운 수수께끼를 푸는 데 시간을 할애해 주기를 청했다.      

 그 후에도 수도원에서는 베난티오가 돼지피 항아리에 거꾸로 처박힌 채 발견되었고, 베렝가리오가 행방불명되었으며, 본초학자 수도사인 세베리노가 시약소 실험실에서 머리를 얻어 맡고 시체가 되어 흥건한 피 위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장서관 사서였던 말라키아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수도원이라는 특수한 장소에서 일어난 아델모를 필두로 한 이 네 죽음은 얼마나 비참했던가?

 그들의 죽음은 과연 무엇을 지키기 위한 죽음이었을까?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장서관에서 시작된 불이 수도원의 크고 작은 건물에 차례로 옮겨 붙으면서 수도원 전체가 불바다로 변한 것이었다. 수도원은 불바다였다.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장서관이 있던 수도원이었다. 자기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던 호르헤 노인의 얼굴을 상상해 본다.


 윌리엄 수도사는 아드소에게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호르헤 노인은 저 나름의 진리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허위로 여겨지는 것과 몸 바쳐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라고 말한다.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일, 그것이 바로 궁극적 진리’라는 문장에서 멈춰 선다.


 ‘유용한 진리라고 하는 것은 언젠가는 버려야 할 연장과 같은 것’이라는 말로 다시 돌아간다.      


  흔히 암흑시대라고도 불리는 중세는, 최후의 심판 날로 예언된 주후 10세기를 훨씬 넘겨, 많은 믿는 사람들을 당혹케 했던 시기이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그러한 세계 종말과 최후 심판에 대한 예감을 안고 살아가는 가운데에서도 계몽주의와 인간성에 눈을 뜨는 인문주의 또는 인본주의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반갑다.     


 인간이 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처사가 되는 것일까?     

 이 책을 통해서 당시의 생활상, 종교관, 세계관 등을 엿볼 수 있었고 그 시대의 지나치게 완고한 종교에 대한 태도를 바라보면서 이성이 살아있고 인간을 바라보는 올바른 눈을 가질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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