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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해 Aug 28. 2021

사람의 부엌

냉장고 없는 부엌을 찾아서


 엊그제 냉장고 안에서 곯은 토마토와 상해버린 돼지고기를 버리면서 아깝다고 생각했지만, 오늘 새로 산 토마토와 돼지고기를 다시 냉장고에 채워 넣고 있는 것이 대형냉장고 한두 대씩 끼고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현대인들은 냉장고에 대한 지나친 믿음으로 무엇이든 많이 사다가 냉장고에 넣어둔다.

 이 책은 냉장고 없는 부엌을 찾아서 떠난 작가 류지현의 발자취와 그녀의 작지만 힘 있는 목소리를 담고 있는 오밀조밀한 색깔의 식재료가 담긴 장바구니 같다. 예쁜 책이다.     


 저자 류지현은 이탈리아와 네덜란드를 거점으로 다양한 시도와 작업을 하고 있는 젊은 디자이너다. 그녀의 “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해 내자” 프로젝트는 사라져 가는 음식 저장 지식에 디자인이라는 형태를 입히는 것으로 출발했다. 냉장고에 꼭 보관하지 않아도 괜찮은 식재료들, 혹은 보관하면 안 되는 식재료들을 알리고, 그 식재료를 보관하는 방법을 냉장고가 없던 시절을 살았던 이들에게 배워 알리고자 했다. 이 책에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인 식재료들에 대해, 그리고 그 생명을 다루는 삶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냉장고가 없던 시절 음식을 저장했던 사람들의 지혜를 찾아 나선다.

 암스테르담의 실외 음식저장고(아기자기한 벽돌 건물 창가에 매달려 있는 비닐봉지나 상자), 파리의 가르드 망제(아파트 부엌 창문 아래 바깥으로 나있는 찬장), 이탈리아 토리노의 눈 저장고(길에 쌓인 눈을 지하 창고로 쓸어 내려 얼음처럼 단단해지면 저장고의 온도를 낮추는 방식), 니가타 현 산비탈의 눈 저장고(산비탈 경사진 면을 이용해 눈을 모아 얼음을 만드는 방식), 인도의 테라코타(옛 인도 사람들의 물 보관 단지로 유약을 바르지 않은 단지의 표면을 통해서 수분이 증발하면서 내부의 온도가 떨어지는 방식) 등이다.     


 저자는 또 냉장고 없는 부엌을 찾아서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탈리아 루실리에에서 렌자라는 여성을 만난다. 그녀는 작은 텃밭에 호박, 가지, 샐러리, 빨갛고 푸른 상추, 바질리코 등의 허브와 토마토를 키운다. 이탈리아 토마토를 먹어보면 한국 토마토는 명함도 못 내밀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고 한다. 렌자의 저장창고에는 여러 종류의 토마토가 쌓여있었다. 토마토는 냉장고에 보관하면 안 되는 대표적인 채소로, 10도 이하면 냉방병에 걸린다. 토마토가 냉장고 안에 들어가는 건 사람이 냉동고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셈이다. 맛있는 토마토의 비밀은 다름이 아니라 냉장고 밖에 보관하는 것이다.      

 

 이탈리아 바르바레스코에 살고 있는 오레스테의 집에서는 달콤 쌉쌀한 10월의 와인을 만났다. 저자는 생애 처음으로 그 곳에서 와인 됫병을 보고 신기했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 외곽의 작은 마을 토메리에서는 와인용 포도가 아닌 식탁용 포도를 오래 저장하는 방법이 있다. 꽃병에 꽃을 꽂듯이 유리병에 포도송이를 꽂아서 보관하면 냉장고에 보관할 때와는 달리 단맛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베네수엘라의 여든이 넘은 의사 할머니, 안헬라의 정원에서는 남미의 맛있는 태양 아래에서 말린 반 건조 바나나를 만난다. 더운 지방에서 온 바나나는 냉장고 안에 들어가면 낮은 온도에서 고생하다 새까맣게 죽어버리게 된다.      


 저자는 쿠바에 살고 있는 페페의 저장 음식 연구소를 찾아 간다. 햇볕으로 말리거나, 설탕 식초 소금 기름등에 절이거나, 발효를 시켜서 먹거리를 저장하고 영양가치도 높이는 방법을 보면서 우리의 음식저장 문화를 떠올린다.


 미생물의 종류에 따라 발효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맥주, 막걸리, 와인, 김치, 요구르트, 치즈, 간장, 된장 등 아주 매력적인 분야라고 할 수 있다. 발효는 우리의 몸에도, 지구의 건강에도 좋은 지속 가능한 저장법이다.

 생명이 흐르는 곳으로 길을 내어 주는 방법이다.     

 생존을 위해 인류는 자연에서 터득한 방법을 바탕으로 식재료를 오래도록 저장하기 위해 수많은 방법을 개발해 왔다. 그런데 냉장고가 우리 삶에 들어오면서 음식 문화가 점점 더 빈곤해지고 있다.      


 냉장 시설이 없던 시절에는 가을에 추수한 작물들을 어떻게 잘 보관해 겨울을 날수 있을 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말린 토란대가 듬뿍 들어간 육개장, 알싸한 고춧잎향이 가듯한 무말랭이 김치, 바람과 햇살로 말린 황태, 깊은 바다의 맛 과메기, 극장의 추억 마른오징어, 진한 국물의 일등공신 마른 멸치, 가쓰오부시, 유럽의 말린 대구, 자연이 완성하는 양념인 젓갈도 냉장고가 없었기에 누리는 맛이다.     

 일반적인 냉장고의 온도는 1도에서 4도다. 각종 채소나 과일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그 평균적인 온도에 모든 식재료를 보관하면 어떤 것들은 저온 장애를 겪어 색이 변하고 물러지고 그 채소가 가진 고유의 맛이 없어지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겉은 멀쩡해도 속은 골골거리는 채소를 먹는 셈이다.      


 우리네 식탁에 건강한 변화가 필요하다.     


 책에 소개된 이탈리아인 리타 여사의 유럽에서의 냉장고 없는 풍경 이야기 중 하나를 소개한다.

 ‘어느 날 단단히 마음먹고 칠면조를 잡았지. 그러고는 동네 사람들 죄 불러다가 칠면조 파티를 벌였어. 그 때는 그랬다고. 고기가 많으면 어쩌겠어. 나눠 먹는 수밖에.’ 그 때는 동네 사람들과 나눌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어촌의 풍경도 냉장고가 생긴 후에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옛날에는 잡아온 생선을 온 마을 사람들과 나누어 먹곤 했는데 냉장고가 있으니 남는 것은 손질해서 냉동실에 쌓아놓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게 쌓아놓은 것들을 알뜰히 다 먹어준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냉동실 안에 수개월간 방치되었던 음식들을 버리고 청소하는 날에는 우리는 얼마간의 죄의식을 가진다.

 냉장고의 부엌을 사람의 부엌으로 바꾸어나가야 한다는 작가의 말에 동의하면서 우리 집 냉장고 문을 열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더러 힘들기도 하지만 식구들을 위해 건강하고 생명이 살아 흐르는 부엌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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