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혈실에서 생의 유한함과 마주치다

검붉은 목숨이 울컥울컥 흘러나온다

by 은해

푸른 혈관에서 붉은 피를 뽑는다.

일 년에 한 번씩 하는 건강검진을 하러 병원을 찾았다. 전 날 저녁부터 금식을 한 상태로 제일 먼저 들러야 하는 곳은 채혈실이다. 제법 이른 시간인데도 종합병원의 채혈실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번호표를 뽑은 후에도 한 참을 기다려야 차례가 올 정도다. 휠체어를 타고 링거 병을 꽂은 채 기다리는 사람, 머리가 뽀얀 할아버지, 자식들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는 허리 구부정한 할머니도 있다.

그런데 아직은 한창으로 보이는 젊은 아가씨도 눈에 띈다. 저런 사람은 무슨 일로 피검사를 하는 것일까. 아직 젊은데... 다들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 이처럼 이른 새벽에 채혈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것이겠지. 결코 자주 오고 싶지 않은 이런 곳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는데 내 순서가 되었다.

옷을 걷고 간호사 앞에 팔을 내민다. 간호사는 주삿바늘 꽂을 자리의 혈관을 손으로 몇 번 가볍게 두드리더니 주먹을 쥐어보란다. 누런 고무줄로 팔을 묶고 나니 혈관이 조금은 불쑥 드러나는 것 같다. 푸른 혈관 속으로 간호사가 찌른 바늘이 길을 찾느라 잠시 통증이 느껴진다. 잠시 후 주삿바늘 뒤 호스에 연결해 놓은 작은 병 속으로 검붉은 색의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내 몸 안을 돌고 있는 생명이 흘러나온다.

엄마의 자궁에서 살다가 산도를 여행하고 막 세상으로 나온 아기를 ‘핏덩이’라고 말한다. 어린 사람을 나무라거나 할 때 우리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라고 표현한다. 젊고 혈기왕성한 청년들을 보고는 ‘피 끓는 청춘’이라고 하고, 같은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을 ‘피를 나눈 형제들’이라고 한다.

의지나 의욕이 매우 강한 상태를 ‘피가 뜨겁다’고 하고, 몹시 괴롭거나 애가 탈 때도 ‘피가 마른다’고 한다. 핏줄로 이어진 골육 사이에 남다르게 친화력이 있다고 할 때는 ‘피가 켕긴다’고 하고, 격렬하게 의분을 터트릴 때는 ‘피를 토한다’고 한다. 남이 가진 재산이나 노동력을 착취할 때는 ‘남의 피를 빨아먹는다’고 하고 어떤 일에 온 힘을 다 바쳐 희생할 때는 ‘피와 땀을 바친다’고 한다.

혈육의 정이 깊다는 것을 강조할 때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말한다. 흉악한 범죄자나 아주 인정머리 없는 사람을 비난할 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고도 한다.

‘피’라는 말은 우리의 생명을 일컫는 또 다른 표현인 것이다.

검붉은 목숨이 울컥울컥 흘러나온다.

건강검진의 가장 기본이 혈액검사다. 혈액 속에는 우리 몸의 중요한 정보들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채혈을 하고 있는데 왠지 그 작은 병 속의 피가 내 몸의 이력을 다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갑자기 슬픈 감정이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난데없는 목숨의 유한함을 그 순간에 맞닥뜨린 것이다. 어느 시인은 우리의 목숨을 파도처럼 왔다 가는 것이라고 했다.

바로 그 유한함 때문에 사람의 목숨은 무한의 값어치를 갖는다.

피를 뽑고 있는 간호사 앞에 무기력하게 앉아서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하고 있다. 주먹을 쥐라면 쥐고 펴라면 펴고, 채혈을 마친 후에는 그녀가 내민 알코올 솜으로 주삿바늘이 들어갔던 자리를 꾸욱 눌러 다시 소중한 목숨을 내 몸 안으로 갈무리한다. 한 참을 기다려 지혈을 시킨다.

며칠 후면 건강검진 결과를 보기 위해서 흰 가운을 입은 인정머리 없는 의사 앞에 앉아있을 것이다. 하나의 파일로 잘 정리된 숫자들을 보며 그저 그 의사가 하는 말에 그대로 수긍해야만 할 것이다. 검사 결과가 이러저러하니 이러저러 조심하고, 운동하고, 이런저런 수치들이 잘 관리되지 않으면 다음에 올 때는 약을 처방해 줄지도 모르니 열심히 노력하라는 부드러운 협박의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요 목숨인 정말 소중한 피를 다섯 병이나 뽑아주고 나니 왠지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간호사에게 그 양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보았다. 합쳐서 20cc라는 대답이다.

애고, 내 피 같은 ‘피’를 그렇게나 많이 뽑아가다니 괜스레 죄 없는 간호사를 원망하며 병원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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