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살면 되는거다

굳이 나이를 확인할 필요가 없다

by 은해

어디쯤 가고 있을까?

책을 읽다 보면 내가 그 책의 어디쯤을 읽고 있는지 궁금해져서 자꾸만 몇 페이지에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별 재미없는 책일 때는 그 책을 빨리 읽어치우고 싶어서 페이지를 확인하게 되고, 아주 재미있는 책일 때는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이 아까워서 또 페이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더러는 굳이 페이지를 확인하려고 하지 않아도 책의 아랫부분에 적힌 페이지 수가 저절로 눈에 들어온다. ‘지금 90페이지에 있습니다.’ ‘지금은 259페이지에 있습니다.’하고 알려준다. ‘그렇구나. 아직은 책의 초반이구나. 아, 벌써 다 읽어가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는다.

그런데 이 책은 페이지 표시가 없다.

습관처럼 얼마간 읽어나가다가 페이지를 확인해 보려는데 아예 표시해 놓지 않았다. 책을 만들면서 페이지를 표시하지 않기로 한 것이 작가의 생각인지 아니면 출판사의 아이디어였는지 모르겠다. 작가의 생각으로 이렇게 만든 것이라면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페이지 표시가 없어서 처음에는 살짝 불편하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그래, 책을 읽으면서 굳이 페이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하는데 생각이 가 닿는다. 페이지를 알고 읽으나 몇 페이지인지 모르고 읽으나 그 책을 읽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무슨 상관인가.

그저 책을 읽을 때 재미있으면 그만이다. 책을 읽다가 어느 한 구절에 잠시 머물러 나를 돌아다볼 수 있으면 그걸로 그만이다. 책을 읽다가 어느 한 대목에서 작가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고, 덩달아 내 상처가 되살아나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책을 읽다가 간장종지처럼 좁아졌던 내 마음이 슬며시 누그러지면서 이른 새벽 창이 밝아올 때처럼 마음이 환해지기라도 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책을 읽다가 너무 웃겨서 혼자 키득키득 웃다가, 혼자 웃기는 아까워서 친구에게 전화해 그 구절을 읽어주거나 친구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공책을 꺼내 적어둘 수 있다면 행복하다. 책을 읽다가 내 인생의 난제를 풀 수 있을 만큼 대단한 명언을 만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어떤 때는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달콤한 일이 아닌가.

책이란 것은 그냥 읽으면 되는 것이다. 굳이 페이지를 확인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페이지 표시 없는 책을 읽다가 느닷없이 기뻐진다. 그래, 페이지를 확인할 필요가 뭐가 있어?

그냥 살면 되는 거다.

십 대에는 누가 나이를 물으면 조금 부끄러웠다. 너무 어린가 싶어서 얼른 나이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십 대에는 나이를 얘기할 때 자랑스러웠다. 내 빛나는 청춘이 누가 보아도 아름다울 거라고 생각했었다. 삼십 대와 사십 대에는 내 나이를 밝혀야 할 자리에서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인생이란 언제까지나 그렇게 삼십이나 사십이라는 나이처럼 당당할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오십 대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 그제야 비로소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알게 된 것만 같았고 스스로 성숙한 여인으로서 느껴지는 자신감이 있었다.

아차,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가 나이를 세는 것이 싫어졌다. 그러던 차에 페이지 없는 책을 만났는데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책을 쓰는데 굳이, 꼭, 반드시 페이지를 표시할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작가와 동지의식을 느끼면서 이 책을 읽다가 책도 작가도 사랑하게 되었다.

그냥 읽으면 되는 것이고, 그냥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어느 페이지에 머물러 그 순간에 만난 한 문장과 더불어 슬프거나 기쁘거나하면서 행복해지면 그만이다.

나를 이렇게 행복하게 만들어준 책은 이병률의 여행 산문집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이다. 어쩌면 작가도 생을 살면서 더 이상 페이지를 확인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글이 적혀있는 페이지에 잠시 머물러 본다.

‘허기를 달래기엔 편의점이 좋다. 시간이 주는, 묘한 느낌을 알기엔 쉬는 날이 좋다. 몰래, 사람들 사는 향내를 맡고 싶으면 시장이 좋다. 사랑하는 사람의 옆모습을 보기엔 극장이 좋다.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기에는 파도가 좋다. 가장 살기 좋은 곳은 생각할 필요 없이 내가 태어난 곳이 좋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위로받기엔 바람 부는 날이 좋다. 여행의 폭을 위해서라면 한 장보다는 각각 다르게 그려진 두 장의 지도를 갖는 게 좋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걸 알기 위해선, 높은 곳일수록 좋다. 세상 그 어떤 시간보다도,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시간이 좋다. 희망이라는 요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두근거릴수록 좋다. 고꾸라지는 기분을 이기고 싶을 때는 폭죽이 좋다. 사랑하기에는 조금 가난한 것이 낫고 사랑하기에는 오늘이 다 가기 전이 좋다.’

책이란 그저 오늘 만난 그 한 문장을 사랑하면서 읽을 수 있는데 까지 읽으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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