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마음으로 살고싶다

여행이란 떠나면 언젠가는 돌아와야한다

by 은해

정주(定住)의 삶을 살고 싶었다.

큰 집이든 작은 집이든, 아파트든 전원주택이든, 오래된 집이든 새집이든 간에 우리는 우리가 머무를 수 있는 집을 갖기를 원한다. 결혼 초기에 작은 주공아파트에서 전세를 살고 있을 때 얼마나 내 집 갖기를 갈망했는지 모른다. 집을 비워달라는 집주인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무슨 수를 쓰든지 꼭 내 집을 장만하리라 결심했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녀야 하는 생활이 아니라 한 곳에서 오래도록 살 수 있는 정주의 삶인 것이다. 아늑하고 편안하고 익숙하고 느긋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내 집 말이다.

나만의 집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퇴근해서 돌아오면 변함없이 나를 맞아주는 작은 현관이 있고, 지친 몸을 던지듯 누일 수 있는 소파가 있고, 어제 보던 드라마가 연이어 방송되는 텔레비전이 있고, 가족들과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는 식탁이 있는 곳, 밤이면 편히 누워 잠을 잘 수 있는 소박한 침대가 있는 곳, 그런 집을 꿈꾸는 것은 모든 사람의 소망일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하여 처음으로 내 집을 장만했을 때는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된 것처럼 좋아한다. 생애 첫 집으로 열다섯 평 아파트를 마련했을 때 얼마나 기쁘던지 특급호텔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렇게 마련한 집에서 오래오래 살 줄 알았지만 겨우 4년 정도를 살고 다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직장 문제 때문에 또는 연이어 생기는 또 다른 사정으로 그 후로도 지금까지 열다섯 번 정도 이사를 다녔다. 우리가 끊임없이 안정된 정주의 삶을 살기를 원했지만 세상일이란 그렇게 흘러가 주지 않았다.

나는 여행자다.

시간이 흐르면서 생활이 조금씩 나아지고 집도 넓혀갔다. 이상하게도 생활이 안정되고 여유를 찾아가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여행을 꿈꾸게 된다. 어쩌면 우리 인간들에게는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흘러 다니는 여행자의 DNA가 잠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편안하고 익숙한 집이 아닌 어디론가 새로운 세상을 향해서 떠나보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래서 국내여행은 물론이고 가끔씩 해외여행을 다니며 견문도 넓히고 새로운 문화와 음식도 접해보는 시간을 갖고 싶어 한다.

사십 대에는 남편의 직장을 따라 미국 주재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5년 동안 미국의 동부와 서부 그리고 남부, 미국의 최남단인 키웨스트까지 여행을 했다. 여름휴가철이면 가까운 캐나다와 멕시코를 여행했다. 가는 곳마다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지만 모두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다만 서로 피부색과 언어 같은 것들이 다를 뿐이었다. 어느 곳이나 저마다 슬프고도 아픈 이야기를 간직한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편안하게 그러나 나약하게 살아가고 있는 미국의 원주민들을 보면서 인간에게는 정주의 삶이 아니라 어쩌면 끊임없는 흘러 다니는 유랑민의 삶이 오히려 더 나은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더러 어떤 이들은 우리 가족의 주재원 생활 이야기를 해주면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와 내 집을 떠나 있는 그 5년 동안 나는 항상 나그네의 심정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늘 마음 깊은 곳에는 5년이란 시간 동안 무사히 잘 지내다가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는 다짐을 하며 살았던 시간이다. 다름 아닌 유랑민의 삶 그것이었다.

여행자의 정신으로 살아가고 싶다

새로운 세상을 향해서 떠나는 여행은 결국은 자기 자신을 만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의 여행자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다. 여행이란 떠나면 언젠가는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와야 하는 단기 프로젝트다.

어쩌다가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여행자의 신분으로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제법 긴 시간 동안 더러는 정주의 삶을 꿈꾸며 내 집도 장만해보고, 더러는 집을 떠나 훨훨 날아다니는 길고 짧은 여행도 해 보았다.

마침내 인생, 그것이 바로 여행을 떠나와 어느 한 길모퉁이에서 잠시 머무르고 있다가 돌아가는 장기 프로젝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여행길에서 함께 가는 길동무들을 만나 소소한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삶이 곧 여행이라는 여행자의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길동무들이 가끔 나를 서운하게 하더라도 분노하지 않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욕심 주머니도 슬그머니 풀어놓고 새처럼 나비처럼 여기저기 흘러 다니며 세상 구경이나 실컷 했으면 좋겠다.

여행자의 정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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