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문 좀 닫지 마세요.”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에 혼자 자는 훈련을 시작했다. 이제는 초등학생이 되는 거니까 씩씩하게 혼자서 자야 한다고 설득을 하고 따로 방을 마련했다.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늘 엄마와 함께 자다가 갑자기 혼자 자야 한다는 사실이 불안하기도 하고 무서웠겠지만 그래야 씩씩한 어린이가 될 수 있다는 부모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따랐다.
그런데 한사코 문을 닫는 일만은 완강히 거부했다. 문을 닫으면 엄마와 단절되는 느낌이 들어서 그랬을까. 자기가 자는 방문도 열어두고 엄마가 자는 방문도 열어두는 조건으로 혼자서 자겠다는 것이다. 서로의 방문을 열어두어야만 자다가도 ‘엄마’하고 부르면 언제든 달려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아이가 잠든 뒤 몰래 문을 닫아주고 나오면 자다가 깨서 울고불고 난리가 난다. 문을 닫지 않기로 약속해놓고 왜 문을 닫았느냐고 항의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가 혼자 자는 것에 적응이 될 때까지 오랫동안 방문을 열어두고 잘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단절’ 그것이었다.
“제발 방문 좀 잠그지 마라.”
그랬던 그 아이가 자라서 사춘기를 맞을 즈음부터는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학교에 갔다 돌아와 자기 방에 들어가면 바로 문을 닫아거는 것이다. 도대체 방문 잠그고 들어앉아 그 안에서 무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네 방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노크를 하겠으니 방문을 그렇게 꼬박꼬박 잠그지는 말라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부모의 말이 더 이상 돌봄이 아니라 잔소리나 간섭으로 느껴지는 시기라서 그런다고 이해를 해보려고 노력해 보지만 왠지 서운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더러는 빨래한 속옷을 전해주려고, 더러는 가지런히 깎아 놓은 과일 접시를 들고 아이의 잠긴 문 앞에 서서 방문이 열리는 순간을 기다릴 때는 치사하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하고 가끔은 아주 조금 슬프기도 하다.
닫힌 문 앞에서 느끼는 것은 ‘단절’ 그것이었다.
‘문을 열어다오.’
로미오도 아름다운 줄리엣의 창 아래에서 ‘창문을 열어다오.’라고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렀다.
문을 연다는 것은 관계의 성립을 의미한다. 문을 열어주어야 그 사람의 마음과 서로 소통할 수 있다.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너의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은 더러는 열기 위해서 존재하고 또 더러는 닫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서운하게 하거나 나를 무시할 때, 우리는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 문을 닫아야겠다고 채 의식을 하기도 전에 마음의 문은 순식간에 닫혀버리고 만다.
마음의 문을 닫는다는 일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만 다시 마음의 문을 연다는 일은 간단치 않다.
마음의 문을 다시 열기 위해서는 우선은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다시 열고 싶어도 그렇게 쉽게 열리지 않는 것이 ‘마음의 문’이다. 나를 서운하게 했던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시간이 필요하고 나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렇게 두 개의 마음을 이리저리 쓰다듬고 보듬어 주어야 비로소 마음의 문이 다시 열리게 된다.
아주 조금씩·······
내 아이가 방문을 잠글지라도 부모는 항상 아이를 향해서 문을 열어두는 존재다. 이 세상을 살면서 힘들고 지칠 때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는 자리가 되어 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다.
내 아이뿐 아니라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마음의 문을 열어두고 싶다.
그러면 그들도 나를 위하여 그들의 마음 문을 활짝 열어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