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그 남자가 우리집에도 있다

by 은해


사람이 거기에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이 거기에 있다. 씨앗을 한 움큼 손에 쥐고 땅을 향해 흩뿌리는 그의 몸짓에 고단함이 묻어난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대로 노동은 인간의 숙명인 것인가. 그의 어깨가 무거워 보인다. 지난해에 추수한 곡식들이 다 바닥이 나고도 목숨처럼 고이 간직했던 종자 씨앗이 아닌가. 그 씨앗들이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열매를 맺을 때까지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농부의 손길을 요구하겠지만 그는 추수 때 거두어들일 알곡들을 생각하며 씨를 뿌리고 있다. 육신이 힘들고 지치더라도 소박한 음식 접시를 앞에 놓고 온 가족이 둘러앉을 저녁 식탁을 마음속에 그리며 오히려 씨를 뿌릴 수 있어서 감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들아이를 생각하면 저절로 힘이 난다. 씨를 뿌리고 있는 손길에 부정(父情)이 내려앉아 손의 움직임이 시간이 흐를수록 춤꾼의 춤사위처럼 신바람이 난다. 부드럽게 쑤어낸 오트밀을 오물거리며 받아먹는 고놈의 입 모양새를 생각하니 등줄기에 흘러내리는 땀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도 모르게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씨 뿌리는 사람의 가슴속에는 희망이 자리하고 땅은 그의 수고를 기억할 것이다.


그의 화폭에는 사람이 있었다.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의 작품 전시회장에서 <씨 뿌리는 사람>과 <감자 심는 사람들>이라는 작품 앞에 멈추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 작품 속의 인물들이 작품 밖으로 걸어 나오는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니 씨를 뿌리던 그 남자가 불쑥 내 앞에 서서 말을 건넨다. ‘만인을 먹여 살리는 농부는 위대하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밀레의 목소리였다. 밀레의 작품 속에서 씨 뿌리는 그 남자는 바로 작가의 영웅이었다.


작가의 영웅인 그 남자는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그 남자가 씨를 뿌리고 가을이면 추수하게 될 그 알곡들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함께 이루어낸 기적이 될 것이라고.


<추수 중에 휴식> 같은 작품도 농민의 삶을 영웅적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양치기 소녀>라는 작품 속의 그 소녀는 씨 뿌리는 남자의 누이동생일 거라고 혼자 마음속으로 믿으며 아름다운 가족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들 오누이도, <감자 심는 사람들>이라는 작품에서 걸어 나온 부부도 모두 어릴 적 우리 동네에 살던 이웃처럼 낯이 익다.

밀레의 작품은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영원한 감동을 준다. 그 이유는 밀레가 민중의 고통과 함께하려 했던 그의 진정성을 그림에 담아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인간의 행복, 노동의 고결함, 만인의 평등, 세계의 평화 같은 가치를 가장 소중하게 여겼다고 한다.

<씨 뿌리는 사람>에서 얼굴이 선명하지 않은 익명의 젊은 남자, <감자 심는 사람들>에서 서로 도우며 감자를 심고 있는 부부와 나무 밑에 누여져 있는 아기의 모습은 그저 열심히 노동하는구나 또는 평화롭구나 하는 느낌을 넘어 무언가 경건하게까지 느껴진다. <추수 중의 휴식>에서 힘든 농사일에 지친 농부 한 사람이 엎드려 쉬고 있는 모습은 밀레의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동시에 느끼게 해 준다.


여기에도 사람이 있다.

모처럼 전시회 나들이를 끝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씨 뿌리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더니 여기에도 사람이 있다. 삼십 년이 넘도록 아내와 아들을 위해서 해가 뜨면 부지런히 씨를 뿌리러 나가던 그 남자가 바로 내 곁에 있다. 그는 화창한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이나 바람이 부는 날이나 아침이면 어김없이 밭으로 나갔다. 해가 지고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일하는 날도 많았다. 식구들에게 차마 일일이 말하지 못했던 어려움과 곤란함이 얼마나 많았을까. 육신의 고단함에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또 얼마나 심했을지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짠해진다.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의 얼굴에서 매일 이른 아침에 씨를 뿌리러 출근길에 나서던 그 남자의 고뇌를 본다.


그 긴 세월을 살면서 한 달도 빼놓지 않고 월급을 월급통장에 입금시키느라 고단했을 그 남자의 존재가 오늘따라 더 크게 느껴진다.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이라는 작품 안에서 씨를 뿌리는 사람이 영웅적인 크기로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밀레의 작품 속 씨 뿌리는 그 남자가 우리 집에도 있다.



◈제목 ‘씨 뿌리는 남자’는 밀레의 작품 <씨 뿌리는 사람>에서 인용함

◈사진 출처: 장프랑수아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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