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예를 중시하는 문화를 고수해왔다. 남녀 칠 세 부동석이나 장유유서가 다 그렇지 않은가. 남녀가 유별하다 하여 ‘남녀칠세부동석’.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 하여 ‘장유유서’라고 하였다. 관계 안에서 이렇듯 예를 목숨보다 중시한 민족이 또 있을까. 나아가 군신유의라 하여 나라의 어른과 집안의 어른을 하나로 보고 존중하는 것을 넘어 복종까지 한 민족이지 않은가.
그럼 지금은 어떤가. 이런 서열식 복종을 예로 치부하는 문화가 근대에 와서 가부장적인 문화로 굳어져 나타났고, 현대에 와서는 소위 꼰대 문화로 잔재하고 있음이 확연하다. 물론 근간에 와서 꼰대의 범위가 권위주의 사고를 가지고 ‘어른’으로 대우받기를 원하는 나이 든 사람에서 ‘라테는 말이야’를 남발하는 귀여운 젊은 층으로까지 확대되기는 했지만서두 말이다.
꼰대를 가늠하는 척도라는 게 있다. 그가 주로 하는 말을 통해 꼰대임을 증명한다는 것인데. 즉 당신이 꼰대인지를 여섯 가지 6하 원칙으로 진단해볼 수 있다. 꼰대의 말을 관찰해보면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 범주로 분류 가능하다.
Who(내가 누군지 알고 그러는 거야?)
When(내가 왕년에 말야.)
Where(어딜 감히?)
What(네가 뭘 안다고 그래?)
How(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지?)
Why(내가 그걸 왜 해?)
당신이 주로 사용하는 말이나, 속에서 주로 올라오는 감정과 생각을 잘 살펴보면 당신이 꼰대인지 스스로 판단해볼 수 있겠다. 생각해보라. 이런 꼰대는 널려있다. 당신 집에도 있고, 회사에도 있고, SNS에도 있다. 동네 사거리에도 있고,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도 있다. 시장에도 있고, 백화점에도 있고 광화문 광장에도 있다. 권위적인 이 유형의 꼰대들의 특징은 주로 화가 많고, 목소리가 크며,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말이 짧다. 말을 잘라먹은 것도 아닌데, 이들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주로 반말부터 시전하고 시작한다. 하고 싶은 말도 많아서 좀처럼 말을 끝내지 않는다. 권위적인 꼰대는 자신의 말을 들어먹지 않는 부류나, 자신과 근본적으로 다른 사고체계를 가진 이들과는 외국 사람처럼 말로 소통하지 못한다. 그게 정상이다. 외국인과 쉽게 말이 통하면 어디 그게 정상인가.
그런데 최근에는 젊은 꼰대들까지 꼰대 계열에 합류했다. ‘라떼는 말야’를 남발하며 자신의 경험을 풀어먹고사는 신입 꼰대 그룹이다. 이들은 권위적이진 않을 수 있다. 자신을 강하게 주장하거나 말로 상대를 제압하려 시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입 꼰대 역시 현재형이 아닌 과거형인 것은 분명하다. 과거는 한 달 전도 과거이고, 1년 전도 과거이지 않은가. 신형 꼰대는 오래전 과거를 구구절절 우려먹는다기 보다, 최근 과거이든 오래된 과거이든 내가 경험한 것을 우선 중요하다 여기며 시도 때도 없이 그것을 어필한다. 내가 경험한 것을 경험하지 못한 부류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할 우매한 자들’로 여긴다. 그래서 이들 역시 소통에는 실격이다.
이런 꼰대들은 주로 말로 상대를 제압하거나 가르치거나 강압한다. 이들의 주 무기는 ‘말’인 것이다. 그것도 ‘내경험 제일주의’ 일색이다. 내 말을 인정하지 않거나 수용적이지 않을 때는 얼굴을 울그락붉으락 하거나 입을 비죽거리며 마음속 불편감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이런 꼰대 그룹은 상대를 위한답시고 시도 때도 없이, 분위기 파악 못하고 충조평판하며 상대의 기분과 마음을 여지없이 상하게 한다. 이때 만약 꼰대가 건드린 사람이 꼰대였다면, 아니 그 상황에서 마음이 상해 역으로 꼰대를 제압할 마음을 먹었다면, 아니 평소 꼰대한테 당한 대로 꼰대를 답습하고 말았다면 상황은 악화일로가 되기 십상이다. 원래 꼰대였든, 그 상황에 꼰대가 되기로 했든 두 꼰대의 다툼은 가관이 될 터이다. 충조평판 자체가 기본적으로 무시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깔고 있는 데다 권위주의까지 장착한 꼰대의 말이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 향기롭게 나갈 리 없다. 충조평판으로 한 방 먹은 상대 역시 은근 부아가 치민 상태에서 더운 여름날 냉수처럼 상쾌한 말을 선사할 리 없다. 이때 누가 들어도 충조평판이지만, 정작 꼰대 본인은 내가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데, ‘너를 위해’ 이 바쁜 시간에 이토록 고매한 말씀을 시전 했다는 확신으로, 상대의 오만방자한 반응에 그만 기분이 확 상해버린다. 꼰대의 얼굴이 굳어지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굳을 대로 굳어져서 찌그리듯이 내뱉어진다. 그 말을 받는 상대도 역시 빈정이 확 상한다.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처음에 상대를 가르쳐 지키게 해야겠다는 갸륵한 뜻은 어디 가고, 서로 ‘어린 노무 시키’가 ‘말투가 싸가지 없는’, ‘말을 싸가지 없이 하는’, ‘고따구로 배워먹은 ‘, ’애미애비도 없는 ‘ 분들만 남게 되는 것이다.
실컷 감정싸움에, 때로 육탄전에, 더 심하면 ‘니까짓 거 없다고 내가 아쉽냐?’ 하는 망상으로 관계까지 박살 내고 돌아서면, 충조평판 아끼지 않으신 원조 꼰대와 ‘때가 어느 땐데’ 라며 역관광 시켜버린 신형 꼰대는 이긴 사람도 진 사람도 없는 무식한 싸움이었음을 깨닫게 되면... 얼마나 좋으냐. 그렇게 깨달았다면 그들은 이제 꼰대를 졸업하는 것인데, 그럴 리 없다. 콧김 내뿜기 내기라도 하듯 연신 씩씩거리며 갈 길 가면서도 끝내 자신을 보지 못하는, 그래서 그가 꼰대인 것이다.
독서모임에서 만난 나이 지긋하신 한 지인은 목소리를 높이진 않으나 자신의 뜻을 굽히는 법이 없었다. 소신 있는 지성인이다. 새로운 지식에 대한 지적 호기심도 높아 이분의 학구열을 보면, 과연 ‘백세시대 평생 공부’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이분은 그다지 말이 많거나 행동 역시 ‘too much’는 아니다. 그런데 이분은 모든 모임에서 한결같이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최대한 기댄(의자를 아예 제쳤다는 표현이 맞는) 자세로 다리를 벌리고 팔짱을 낀 채 앉아 상대의 말을 경청했다. 팔짱을 낀 채 한쪽 팔을 턱밑에 대거나 고개를 약간 쳐든 상태로 눈을 감으며 집중해 듣다가 가끔 실눈을 뜨고 상대를 보며 ‘잘 듣고 있음'을 어필했다. 그러다 질문거리가 생기면 의자를 책상으로 당겨 앉아 ‘나는 안 해도 되는데~’로 시작하는 자신만의 썰을 삼십 분을 풀어냈다. 과연 이분은 안 배워도 되는 분이었다.
몇 년 전 도서관 독서 강의에서 만난 한 분 역시 나이 지긋한 어른이셨는데, 강사가 질문을 하면 ‘내가 학교 선생 할 때~’로 시작되는 훈화 말씀을 하느라 마이크를 쉽게 넘기지 못했다. 강의 때마다 강사가 애를 먹었는데, 강의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얼마 못가 못 갈 핑계가 많아졌던 기억이 있다. 왕년 학교 선생님 덕분이었다.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에 나오는 ’ 누님‘처럼 이분들이 언제 ‘거울 앞에 돌아와’ 자신을 제대로 마주할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쩌면 이런 유형의 꼰대들은 평생 자신을 마주할 수 없거나,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게 그분들의 사고하는 방식이고, 그 방식은 이미 굳어질 대로 굳어져있을 테니까. 사고(思考)하는 패턴, 즉 방식이나 체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건 아니잖는가. 오랜 외적· 내적 경험을 통해 생각하고 사고하는 과정들이 하나하나 축적되어 형성된 개인의 고유한 품성인 것이다, 꼰대는.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꼰대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꼰대임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을 개연성이 높다. 모르기 때문에 ‘자기 경험 제일주의’에 묶여 자신을 봐야 하는 눈으로 상대만을 보는 것일 테다. 나아가 자신이 꼰대임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축적된 경험과 그로 인해 형성된 고매한 인품을 포기해야 하니, 어찌 당황스럽지 않겠는가. 나아가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존경과 존중을 더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삶의 보람이 있겠는가. 하여, 진짜 꼰대는 알든, 모르든 자신의 노선을 쉽게 변경할 수 없다.
그런데 원조 꼰대이신 한 지인은, 아 물론 그분 역시 강의를 듣거나 회의에 참석할 때의 자세가 남다르긴 하지만, 죽을 때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겠다는 새로운 인생 목표를 세우고 날마다 한 걸음씩 정진하고 있다. 그래선가? 그분은 차츰 자신의 꼰대 기질을 글을 쓰는 데 사용했다. 오랜 본인의 독서경험을 토대로 후대에게 전할 자신만의 고매한 썰을 글을 써서 책으로 출판했고, 그 방법은 그분의 꼰대 탈출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분의 새로운 도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참 다행이다. 그분은 더 이상 꼰대가 내뿜는 특유의 스멀스멀한 부담감이나 거부감은 풍기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 역시 이리 말 많은 꼰대로서 소위 꼰대들에게 한 마디 하자면, 그렇게 가르치고 싶은 것이 많으면, 이제 삿대질해가며 핏대 높여 가르치는 대신,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글로 적어 책을 출판해보면 어떨까. 요즘은 중편 분량의 저서도 전자출판으로 쉽게 출판하거나, 무료 책 출판 사이트도 많아서, ‘뜻이 없지 길이 없냐’라는 말이 실감 나는 세상이지 않나? 갑자기 우리나라 출판계가 새롭게 부흥하며 책 읽는 문화가 확산될 것 같아 혼자 흐뭇하게 씩 웃어본다. (Written by 기윤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