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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였음을

-하얀 눈

by Sapiens


<AM. 5:50>

그가 나였음을



창공을 여행하는 나는 오늘도 낯선 땅을 밟는다. 흩날리며 춤을 추다 보면 어느새 차가운 대지 위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대지 위에서 생명을 다하는 나는 때론 포근함으로, 때론 너덜함으로 짓밟히며 사라진다. 밤사이 친구들이 함께 달려왔다. 세상의 모든 이가 이곳에 모여든 듯 내 주위는 온통 하얗다. 푸른 소나무의 옷들도 온통 하얗다.


하얀 왕국으로 들어선 나는 잠시 침묵하며 사라지는 우리의 실체를 마주한다. 작은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대지 위로 향하는 우리, 그곳이 생의 마지막 종착역이 되어 잠시 머물다 흔적 없이 떠나간다. 다른 빛을 내는 것은 떠오르는 해와 지는 해의 물결이다. 구름 사이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그들도 사라졌다 나타난다.


매일 태어나지만 똑같은 색을 띠지 않는다. 매번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라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내려앉아 또 다른 누군가를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누군가 우리를 짓누르고 비벼대어 진흙투성이가 되어도 아우성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모습의 운명이며 숙명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어느 곳에서건 살갗을 베어내 흩날리며 사라짐을 고요한 정적 속에서 탐미한다. 누군가는 그 모습을 감상하기도, 누군가는 벗겨진 피부조각들을 뭉치고 던지며 추억들을 지어낸다. 그 또한 누군가를 위한 배려로 받아들인다.


한기가 깊어질수록 탄생하는 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세상을 온통 하얗게 덮어버린다. 때 묻지 않은 하얀 마음을 한 움큼씩 나눠주며 잠시 머무는 사색의 시간을 선사해 준다. 떨어지며 피어나는 모습을 감상하며 우리는 또 다른 세상과 마주한다.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감상한다. 찰나적 순간 속에 스치고 지나간다. 그가 나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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