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존재하는 우리는 하나의 객체로 자유로워야 한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수많은 관계 속 얽히고설키며 주어지는 의무와 책임 속에 구속되어 지낸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억눌린 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릴 때부터 부모를 챙겨야 하는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왔다. 물론 개인적인 성향의 문제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유난히 그랬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국사회에서 도리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둘러싸여 자신이 만들어내는 감정에 휩싸여 상대를 바라보고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 관계 속에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복종, 당연시, 해야만 하는 압박, 또 하나의 짐처럼 다가온다. 돌이켜보면 하나의 폭력이다. 그 폭력성은 자기도 모르게 습관화되고 길들여지고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을까?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자아가 형성되면서 동시에 길들여지기도 한다. 어떻게 길들여질 것인가? 순간순간 우리는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그 선택이 타인이 아닌 자신의 결정이어야 한다. 눈치를 보며 타인의 시선에 길들여진다면 결코 그 결정의 끝은 달콤하지 만은 않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날,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나는 가벼운 감정을 느꼈다. 이제 끝이구나! 내가 해야 할 일의 마침이 짓눌렀던 어깨의 짐을 내려놓는 느낌이었다. 이처럼 우린 어떤 책임과 의무를 무의식적으로 넘치게 짊어지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가족이라는 굴레가 만든 무엇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구성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행위인지 새겨본다.
그때는 몰랐다. 생각하지 않은 행위를 행할 때 우린 무조건적으로, 반사적으로 행한다. 그것이 관습, 그 시대의 문화, 자신이 만들어낸 굴레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것들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거인으로 서 있을 수 있을 때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혜진 작가의 <딸에 대하여>에 나오는 젠은 참 행복한 인물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평생 해왔으니까. 하지만 많은 독자와 이야기 속에 나오는 주인공은 그를 불행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와 같은 노년의 삶을 살아갈까 봐 두려워한다. 생각하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바라보는 시선이 불행하면 상대가 한없이 초라하게 보이게 되어 있다. 상대는 젠의 초라하게 보이는 행상을 바라보며 눈물짓고 있지만 상대는 행복한 감정 속에 유영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 앞에 펼쳐진 삶에 대하여 어떻게 바라보고 선택하며 살아갈 것인가? 는 본인의 몫이다. 그 선택의 결과만 존재할 뿐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무엇을 담는가도 자신에 달려 있다. 주변의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자신의 감정을 소모하며 생을 낭비하지 말기를, 그 작은 감정들이 자신을 지배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버린 감정 앞에 휘둘리지 않기란 매우 어렵다. 매몰되어 허우적거리게 되는 순간 자신은 사라지고 타인의 지배라는 굴레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 무엇에도 구속하지 않는 삶,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자신의 선택에 의한 삶을 살 수 있으면 행복이지 않을까. 그 삶이 눈물이어도, 젠의 삶이 아름다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