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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에도

-컵

by Sapiens

<am.5:50>



지금 이 순간에도



매일 너와 함께 하는 아침을 연다. 눈을 뜨자마자 싱크대 앞으로 다가가 네 육체 속에 투명한 물을 담아낸다. 차가웠던 너는 온도의 변화를 받아내고 있다. 차이를 묵묵히 수용한다. 때론 뜨거움, 때론 얼음처럼 차가운 무엇으로 채우지만 그 어떤 거부도 없다. 잠이 덜 깬 나는 너로 인해 어제와 오늘을 구분한다. 네 육체와의 촉감으로 시야가 밝아온다. 아침이다. 세상 속으로 함께 걸어간다. 갈증으로 다시 네 육체를 채운다. 묵직한 너는 나의 움직임대로 유영하며 세상을 항해한다.



함께 서재로 향한다. 책상 앞에 앉아 너를 내려놓는다. 함께 한 시간의 얼룩과 손때가 역력한 너를 마주 본다. 네 모습 그대로 나를 고요하게 해 준다. 너는 형형색색 무엇을 담아내든 매일 같은 모습으로 내 앞에 앉아 시간 속 여행을 함께 한다.



오늘따라 기온이 차갑다. 몸을 움츠리게 하는 가을 아침이다. 따뜻한 물을 가득 담아내 나의 육체를 녹여주고 있는 너의 묵직함이 든든하다. 네 몸에서 피어나는 뿌연 연기는 방 안의 온도까지 올려주고 있다. 시간의 흐름으로 차가운 온도에서 따뜻함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가는 순간이다. 아무런 저항 없이 너는 나의 마음을 녹여주고 있다. 당연하듯 너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일을 하다가도 너의 육체로 다가가 나는 체온을 조절한다. 당연한 주인행세를 하며 네 존재를 망각한다. 당연함이 주는 착각 속에 나는 너를 조종한다.



하던 일을 멈추고 두 손으로 너를 끌어안는다. 순간, 미안한 감정이 올라온다. 덕분이라는 감사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교감한다는 것이란 참으로 부드러운 그 무엇이라는 생각이 든다. 너를 끌어안으며 바라본다. 온몸으로.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너와 동행한 시간을 계산할 수가 없었다. 수많은 시간 속에는 항상 네가 있었기 때문이다. 너와 나는 동반자로 기억을 채우고 있었다. 작은 네가 크게 다가오는 순간이다. 나의 시선이, 마음이, 너를 향해 촉수를 뻗치고 있다. 한참을 바라본다. 참 사랑스럽다. 어느 곳을 가든, 나의 손끝에는 네가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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