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
어느 봄날 걸었던 길을 오늘도 걷는다. 그날 정오에 걸었던 길, 유난히도 화장한 봄날의 그날처럼, 오늘도 생생한 살아있음을 만끽하는 걸음이었지...
오늘까지 반납을 재촉하는 도서관 문자를 해결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섰다. 미납된 책들을 반납한 후에는 오랜만에 도서관에서 책도 읽을 요량이었다. 걸어서 탐라도서관까지 30여분이 걸리지만 따스한 햇살이 벗이 되어 주었다.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도서관은 휴관일이었다. 할 수 없이 도서관 사무실로 가서 미납된 책만 반납하고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도서관 후문으로 빠져나와 햇살과 마주하는 아스팔트 위를 천천히 걸었다. 세 권의 책을 돌려주고 나니 한껏 가벼운 걸음이다. 아직 가방 안에는 한 권의 책이 남아있었다. 항상 여분의 책 한 권을 갖고 다니기 때문이다. 15분 정도 걷다 보니 갈증의 농도는 점점 진해졌다. 시야 속 펼쳐진 도로 위에는 차도를 중심으로 좌측과 우측으로 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해 있다. 우측으로 15도 각도에 내가 즐겨 찾는 더치 빈 카페가 손짓을 하고 있다. 육체의 갈증과 심리적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매번 품어내는 진한 더치커피 향은 오늘도 나의 감성을 자극한다.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고 있는 상큼한 여대생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하고는, 여느 때와 같이 즐겨마시는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아직, 카페 안은 한적하다.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조용한 곳에 위치해 있어서 즐겨 앉았던 테이블이 마침 비어 있었다.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양, ‘어서 와 앉으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도서관에서의 아쉬운 감정은 사라지고 오히려 행운의 여신은 내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분비지 않아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는 사이 주문한 커피가 나오고, 여느 때처럼 테이블 위에는 레몬을 띄운 물 한 컵과 냅킨 여러 장을 준비해 놓았다. 머그잔 밑에는 꼭 냅킨을 깔아야 한다. 그리고 커피 크레마가 사라지기 전에 커피잔을 두 손으로 코끝에 가져가 향을 맡는 동시에 커피잔과 내 정신의 온기를 느끼며 한 모금을 흡수시키면서 오직 내가 살아있음에 몰입한다. 이런 멈춤의 시간은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긴다. 나만의 감성을 충만하는 의식이랄까. 또한 자리에서 자주 일어나지 않기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이 멈춤의 여운은 책 속으로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했고 커피 향에 마취되듯이 부드럽게 책 안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 두 시간 반 정도 지난 것 같다. 한 호흡에 집중해서 완독을 했다. 언제나 마지막 책장을 넘길 때면 마음이 뿌듯하다. 한 사람이 사투하며 써 내려간 그의 모든 것을 통해 나는 오늘도 또 한 사람의 삶을 통해 활력을 얻는다. 오후 5시쯤 카페를 나왔다.
여름의 시작이라 해가 제법 길어진 탓인지 한낮의 뜨거운 햇살이 한껏 부드러워졌다. 살갗에 닿는 햇살의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책이 준 긴 여운 덕분으로 내 발걸음은 더욱 가벼워졌다. 아직도 하늘은 옅은 푸름으로 펼쳐져 있지만 눈이 부시진 않았다. 간간이 작은 바람까지 불어와 피부를 기분 좋게 자극한다. 완독을 해서인지 지금 이 순간, 모든 것들이 마치 나를 위해 존재하 듯, 내 육체의 모든 세포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온몸으로 찰나의 행복감에 취해 걷고 있었다.
걸음을 잠시 멈춰 서서 녹색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던 횡단보도 앞, 바로 그때였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신호등이 켜지자 주절이 주절이 입에서 무언가를 내뱉으며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며 횡단보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어느 화창한 봄날 걸었던 그 길을...
“어머니, 잘 지내지... 어떻게 지내고 있어? 그곳은 어때? 품에 안기고 싶다.”
혼잣말을 내뱉으며 걷고 있는 내 모습이 누군가는 마치 이상한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할 수 없었다. 당신의 숨길을 느낄 수 있어서, 내 옆에 와 속삭여 주어서,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할 수 있어서, 내 심장 조각조각, 하나하나가 쉴 새 없이 뛰고 있었다.
마흔두 살, 나에게 세상을 품게 해 주신 어머니... 감히 어리광을 부리며 엄마라고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던 내 짝사랑의 상대... 이 순간 나는 어머니의 영혼과 속삭이며 어느 화창한 봄날 걸었던 그 길을 같이 걷고 있다.
“보고프다, 어머니...”
삶은 우연의 연속인지도 모르겠다. 1초 후의 벌어질 일을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살다 보면 행운이 찾아올 때는 먼저 불행의 옷을 입고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오늘도 도서관이 휴관일이어서 카페에서 집중해 책을 완독 할 수 있었고, 늦은 오후의 햇살이 나에게 사랑하는 이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으니 말이다.
길을 가다 우연히 스치는 여러 표정의 사람들, 거리 속 풍성하고 왜소한 나무들과 흩날리는 꽃잎들, 크고 작은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건물들, 그리고 그 건물들에 매달려 소임을 다하고 있는 위태로워 보이는 간판들.., 그 수많은 마주침 속에서 그들과 속삭이고 공감하며 나를 만나고, 나 속에서 타인을 느낄 수 있어서 너무나 감사하다.
-2018. 5. 내 마음속 짝사랑의 상대를 만난 어느 화창한 봄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