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그녀는 파리의 한 건물 모퉁이를 돌고 있다. 파란 구두를 신고 트렌치 코트를 흐트러진 채 걸쳐 입어 한 손으로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다. 다른 한 손에는 빨강 우산을 쥐고 있다. 오후에 비가 내린다는 소식을 기억하고 있었다.
20여 년 전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이 거리를 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난히도 반짝이는 에나멜 파랑빛 힐은 그녀의 존재감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참 많이도 흘러갔다. 그녀가 이 약속을 지켜내기 위해 파리로 유학을 왔고 이제 그 꿈을 이루어지고 있는 순간이다.
어린 그녀가 꿈꾸던 파리의 거리를 걷는 자신의 모습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렇게 그녀의 꿈은 또렷하게 펼쳐며 파리의 길 한복판을 걷고 있다. 다시 모퉁이를 돌아가면 그녀의 바람은 사라지고 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