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설사 설사. 머리를 밀다

2020. 4. 25 토

by 전해숙

설사가 계속되고 있다. 밤 낮 구별도 없다. 간밤에도 7~8번을 들락거렸다. 변의를 느끼고 화장실로 뛰어가기도 전에 실례를 해서 할 수 없이 생리대를 착용했다. 밤새 설사 묻은 패드가 휴지통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옆에 수북이 쌓인다. 기진맥진해 슬픔을 느낄 겨를마저 없다.


손 씻으며 쳐다본 거울 속엔 퀭한 눈의 낯선 얼굴이 마주 본다. 살은 모조리 빠져 버리고 잠을 못 잔 얼굴은 영락없이 외계인이다. 죽이라도 먹어야 버틸 텐데 식탁까지 갈 힘도 없다. 침대로 갖다 달래서 먹어 보지만 먹는 중간에도 달려가야 한다. 그렇게 힘들다는 항암 부작용이 내겐 설사로 나타나는 것인가. 쳐다볼 수밖에 없는 가족들도 애가 타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장을 절제한 경우 나타나고 사람마다 지속 기간이 다르다고 하니 달리 방법이 없다. 그래도 지사제를 먹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항암제에 영향을 미칠까 우려해서다. 그저 하루빨리 장기가 적응해 주기를 바랄 수밖에. 대신 체력 보강을 위해 다시 영양제를 맞았다. 조금이나마 덜 힘들다.




1차와 2차 항암 사이에 머리가 빠진다고 한다. 환우가 들려준 조언이다.

"어차피 다 빠지니까 미리 과감히 미세요."

한꺼번에 다 빠지면 덜 심란할 텐데 여기저기 뭉텅뭉텅 빠진다고. 안 빠진 부분의 머리카락과 엉켜 떼어내는 게 더 스트레스라고. 더는 미룰 시간이 없다. 단골 미용실엔 못 간다. 아이들 머리까지 맡긴 오랜 사이다. 소문의 진원지가 될 수 있고 동네 사랑방이니 아는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


아파트 뒤쪽 모퉁이, 사람들 왕래가 많지 않은 곳에 새로 생긴 미용실이 있다. 남편을 차에서 기다리게 하고 들어갔다. 다행히 미용사와 지인인듯한 사람, 둘뿐이다. 힘이 없어 모기만 한 목소리로 사정을 얘기했다. 속으로는 놀랐겠지만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자리로 안내한다. 먼저 긴 머리카락을 대충 잘라내고 삭발 기구로 뒤쪽부터 밀기 시작한다.


봄날 목련 꽃잎 뚝뚝 떨어지듯 나의 분신이 바닥으로 떨어져 나간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 아무런 저항도 없이. 의외로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본인도 울고 함께 간 이모나 언니도 울었다는 사람도 있던데. 설사로 너무 힘드니 다른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던 듯하다.


어느새 거울 속엔 낯선 여자가 있다.

“두상이 참 이쁘네요.”

잔머리를 털어내며 미용사가 한 마디 한다.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이리라. 그러고 보니 60 평생 나의 온전한 두상을 본 것도 처음이다. 전형적인 계란형으로 밉상은 아니다. 깨끗이 씻은 후 시원한 액체를 뿌려 주었다. 갖고 간 가발을 썼다. 원 헤어스타일과 비슷해서인지 감쪽같다.


문을 나서는데 그제야 만감이 오간다. 등 뒤에서 두 여자는 무슨 말을 할까?

‘저 여자가 살아서 다시 머리 손질하러 올 수 있을까?’

꼭 그럴 것만 같았다.

‘그때 머리를 밀었던 암 환자인데 다 나아서 파마 하러 왔어요.’

다시 방문해 오늘을 떠올릴 날이 올까?


남편은 아무 말이 없다. 가족만은 모두 익숙해져야 할 모습이다.

어쨌든 넘어야 할 문턱을 또 하나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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