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도망치듯 나온 김밥 집

2020. 8. 14 금

by 전해숙

종일 우울한 날이다. 머피의 법칙이 진실 같기만.


전날 TV 보느라 자정 넘어 잔 것이 시발점이었다. 긴 장마 틈새에 열대야까지 겹쳐 잠도 설쳤다. 아침부터 피곤하고 식사 후 잠이 밀려오는 건 당연하다. 사흘 후면 6차 항암을 해야 한다. 컨디션 조절이 최우선이다. 만사 제치고 다시 잠들었다 일어나니 헐~~! 이미 11시였다.


예보됐던 비는 오지 않고 잿빛 하늘만 짙게 내려앉았다. 한낮인데도 주변은 쥐 죽은 듯 고요하다. 한숨 잔 덕에 컨디션은 좋아졌지만 마음은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오전 시간을 허비했다는 생각에 짜증이 올라왔다. 그럴 땐 걸으러 나가는 게 상책이다. 공원 가는 길에 김밥을 사 가자. 중간에 벤치에서 먹으면 기분 전환이 될 것이다.


빈자리가 없을 만큼 사람들이 많았다. 투병 이후 가장 사람 많은 곳엘 찾아간 셈이다. 햄과 맛살 생야채는 빼달라는 말에 그러면 맨밥 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며 점원이 난감해한다. 그 사이 손님이 또 한 명 들어와 김밥을 주문한다.


그런데... 등진 채 식사 중이던 여자가 목소리가 익숙했던지 얼굴을 돌려 그 손님에게 아는 체를 한다. 헉!! 이를 어째, 아들 친구 엄마였다. 그러고 보니 새로 들어온 손님도 아는 사람이다. 주문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고개 숙인 채 도망치듯 나왔다. 모자를 눌러쓴 데다 마스크까지 착용해서 두 사람 다 못 알아본 건 분명하다.


휴~~ 다행이다. 점심시간이라 어디서든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데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심장은 또 왜 이리도 콩닥거리는가. 점심을 먹으려면 도로 집으로 가야 하는데 발걸음은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얼마나 정신이 나갔으면.ㅠㅠㅠ


그래도 부딪히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해골 같은 몰골을 보면 그 누가 놀라지 않겠는가. 거짓말로 변명해야 하고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다. 그건 너무 싫다. 언젠가 웃으며 오늘을 회상할 날이 올지, 영영 만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 그들이 내 입장이어도 그럴 것이다. 예전보다는 많이 달라졌다 해도 ‘암’이라는 단어에는 여전히 ‘죽음’이 연상됨을 어쩌랴.


점점 서글퍼진다.

내가 왜 그 사람들을 피해야 하는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도로 집으로 와 햇반을 데워 먹는데 우울, 점점 더 우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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