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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가는 길

미리 다녀온 추석 성묘

by 파랑나비


어머님, 당신은 지금

얘, 순리대로 사는 거다 매사 탁 풀고 사는 거다 마음 상할 거 없다.

아파할 거 없다 당하는 대로 사는 거다.

늦추며 늦추며 자연대로 사는 거다.

아리게 혼자 사는 게 아니다

순리대로 사는 거다.

잠깐이다. 하시며.

-조병화-


벽에 걸린 달력을 보니 다음 주가 벌써 추석이다.

함정 교대 근무를 하다 보니 평일도 내가 쉬는 날이 휴일 인지라 빨간 날을 깜박하는 날이 많다.

날짜를 헤아려 보니 이번 추석에는 4박 5일 동안 바다에 떠있어야 할 것 같다.

차남이지만 결혼 후 차례와 제사를 담당해왔던 제주 인지라, 이럴 때는 솔직히 힘들다.


고민 끝에 오늘 정남진 장흥에 있는 산소로 성묘를 가기로 결심하고 전날 미리 봐 둔

송편과 과일 나물, 전, 술, 포, 식혜 등을 챙겨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목포까지 가는 고속도로 차창 너머로 보이는 들판은 아직 완연한 황금색은 아니다.

몇몇 성급한 녀석들이 영글지 않은 알맹이를 빼꼼히 내밀어 보지만 아직 초록 초록하다.

자동차로 2시간을 달려 오래전 영화 축제의 촬영지인 장흥군 용산면 남포리 소등섬 해안도로에 도착했다.

득량만의 진득한 갯벌과 갯내음, 물에 반쯤 잠긴 소등을 닮은 소등섬이 고향의 하늘과 함께 나를 반긴다.

분홍빛 생생함을 잃은 배롱나무 꽃을 보며 신나게 바닷길을 달린다. 15분 후 엄마를 모신 산소에 도착했다. 꼭 1년 만에.


벌초는 동네 문중 형님께 몇 년째 맡긴지라 이미 깔끔하게 단장을 해놓았다. 위쪽에 자리한 할머니 묘에 먼저 인사를 드리고 그 밑에 나란히 엄마랑 아버지가 모셔진 묘 앞에 돗자리를 깔고 차례상을 차리고 향을 피우고 절을 두 번 올린다. 언제나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두 분을 떠올리면 먹먹하고 눈물이 난다.


묘 주위에는 가시 갑옷 속 짙은 갈색 알밤이 세상 밖으로 나갈까 말까? 반쯤 갑옷을 벗고서는 속없이 하늘을 보고 웃고 있다. 나는 조심스럽게 가시 갑옷을 마저 벗기고 껍질을 발로 밟아 연한 갈색의 매끈한 알밤을 꺼낸다.


산속이라 모기떼가 오랜만에 사람 냄새를 맡고 집중 공격을 해온다. 나는 모기퇴치 팔찌와 향으로 대적한다. 봉분 위 벌초 후 남은 잡초들의 잔해를 깔끔하게 걷어내면서 엄마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순임 씨! 아들 왔네요. ^^

이번 추석은 제가 바다에 출동을 나가 있어야 해서 성묘를 미리 왔네. 차례는 간단히 모실 테니 이해하시고 한 달 후에 제사니까 그때 아버지랑 같이 오셔서 많이 잡솨.^^

항상 잘 웃고 남 흉내도 잘 냈던 엄마의 밝은 성격과 한없는 자식사랑 덕분에 가난했어도 우리 5남매 반듯하게 잘 커서 큰 누나는 인천서 회사 사장님, 나랑 막내는 공직자, 형과 작은 누나도 평범하지만 잘살고 있어. 성공한 자식들 모습 보고 효도도 받고 좀 천천히 가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쩌다 보니 아들 딸을 내가 키우고 있거든. 익산서 목포까지 기차로 1시간 10분.

택시 타고 해양경찰 경비함정이 주둔해 있는 북항 전용부두 도착해서 경비함정을 타고 전남 진도군 맹골수도 쪽에서 바다를 지켜.


4박 5일 출동 기간에는 애들 먹을걸 준비해줘야 해서 매번 익산역에서 가까운 중앙시장을 가서 장을 봐. 딸이 좋아하는 겉절이, 오이소박이. 아들이 잘 먹는 잡채며 쥐치포, 계란말이 등을 5천 원어치씩 골고루 사 와서 반찬통에 넣어서 냉장고에 잘 정리해 놓으면 애들이 꺼내서 먹고 해. 밥도 5일 치 정도 넉넉하게 해서 냉동실에 미리 넣어두고.


그런데 시장 안 반찬집 맞은편에 떡집이 있거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인절미부터 가래떡, 팥떡, 영양떡 등등 모양도 이쁘고 먹음 직스런 떡이 많기도 하더라고.

그중에 엄마가 제일 좋아했던 쑥 인절미는 배가 불러도 꼭 집어먹고 와.

아마 엄마가 그립고 함께한 추억이 먹고 싶은 걸 거야.

먹을 것 귀하던 그 시절. 십리 길을 걸어 엄마를 따라 오일장에 가면 읍내에 선 장이 어린 나에게는 최고급 일류 백화점이었거든. 엄마는 제일 먼저 팥 칼국수부터 한 그릇 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쑥 인절미를 콩고물 가득 묻혀 내 입에 쏙 넣어주곤 하셨지.


그때 그 맛, 그 고소함과 쫄깃한 식감은 세상 어떤 음식보다도 달콤했고 황홀한 맛이었어. 마치 지금 내가 우울할 때 마시면 기분 좋아지는 달달한 라떼처럼.

어디 그뿐이야 비 내리면 부엌에서 부추랑 호박 넣고 부쳐주던 부침개, 정월대보름 김치만 넣은 어른 팔뚝만 한 찰밥, 갖은양념 발라 쪄낸 코다리찜, 한여름 칠게로 만든 짭조름한 간장게장.


고된 들 일을 마치고 와서 급하게 반죽한 밀가루에 완두콩만 넣어서 한 솥 끓여주던 흰 수제비까지. 엄마의 사랑이 그리운지 쉰 살이 넘은 이 나이에도 시내 맛집을 뒤져서 그 시절 음식들을 종종 맛보곤 해.

엄마! 자식 낳아서 남매를 키워보니 알겠더라. 새끼들 입속에 밥 들어가는 거 볼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하셨던 말. 식 재료도 충분치 않던 그 시절, 삼시세끼 밥 챙기는 게 얼마나 큰일이었고 주부로서 엄마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새삼 느끼고 있는지라 너무너무 감사해.

내 나이 스무 살 때 아버지가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시고 혼자돼서 나 대학 보내고 농사짓고 돈 번다고, 아랫동네 뻘밭에서 갈대 베고 山판 하는 공사장 가서 나무 치고... 안 해 본일 없이 고생을 얼마나 하셨어. 엄마 생각하면 그리움과 애잔함이 함께 와서 항상 마음이 짠해.

그렇게 건강했던 엄마가 너무 몸을 막 써서 그랬을까? 쉰아홉 살에 악성 임파종 혈액암이라는 판정을 받았을 때 세상 무너지는 것처럼 막막하고 슬펐어.


원자력 병원에서 항암제 투여하면서 엄마한테 누룽지도 끓여드리고 병원 치료 끝나면 시골집 내려와 같이 생활하면서, 몸속 종양이 약물 반응을 잘 받아서 열심히 치료하면 엄마 좋아지겠다 싶어 나 너무 행복했거든. 희망도 가졌었고. 근데 겨우 2년 살고 갑작스레 증상이 악화돼서 그리 허망하게 세상 뜰 줄 누가 알았어.


하늘 가시기 며칠 전 “아야! 너는 참 다정한 아들이었지. 내 속에 것을 너한테는 다 털어놓고 살 수가 있어서 논일을 할 때나 밭일을 할 때도 고단 한 줄 몰랐다. 너무 고마웠다” 고 "너도 그렇게 살아야 쓴다" 하셨지.


울 엄마 하늘 가신 날 새벽에 엄마 임종을 못 지켜드린 게 20년이 지난 지금도 두고두고 한이 돼서

가슴에 대못이 박혀있어. 나는 언제쯤 엄마 묘 앞에서 편하게 절을 올릴 수 있을까?


어느 작가님 글처럼 하늘문이 열려 하루만 아니, 반나절만 그것도 아니면 몇 시간 만이라고 엄마 볼 수 있으면 엄마 품에 안겨 기쁜 일 힘든 일 도란도란 얘기하면서 엄마 좋아하는 음식 같이 실컷 먹고 함께 가요무대도 방청하고 싶다.

엄마가 나에게 물려준 밝은 성격과 한없는 사랑. 우리 애들한테 그대로 물려주고 있는 중이야. 엄마! 낳아줘서 고맙고 대학까지 졸업시켜 주셔서 또 감사하고, 엄마 아들로 한 평생 살 수 있어서 행복해.


앞으로도 뭐든 더 열심히 해서 부끄럽지 않은 아들로 잘 살게. 엄마도 거기서는 아프지 말고 행복해야 해.

사랑해 엄마. 아주 많이.

성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마을 입구 빈집에 매끈하게 뻗은 석류나무에 탐스럽게 매달린 빨간 알알이 석류가 나를 보고 웃는다. 어디선가 엄마의 정겨운 목소리 “아들 잘살아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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