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출동을 마치고 모처럼 한가한 어느 평일 오전 10시경 네 살 된 강아지 토토와 함께 익숙한 산책길을 나섰다. 아파트 후문을 나서면 그림처럼 이쁜 단독주택 2채가 있고 그 옆에 오래된 낡은 주택에 시베리안 허스키 사촌 정도로 보이는 목청 좋은 개가 한 마리 있고 또 그 옆에 단군 영정을 모시고 있는 단군의 사당 단군 성묘 유적지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 토토
단군 성묘와 팔각정 주변에 이름 모를 들꽃들이 형형색색 곱게 피어있고 정자에서 내려다본 멀리 만경강 들판에 모내기를 하느라 바쁜 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일상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만남과 인연을 생각하며 아끼고 남겨둘 사람들과 과감하게 삭제하고 정리해서 버려야 할 이들을 떠올리며 상념에 잠겨있는 그때 낡은 주택 대문 앞에 심어놓은 꽃나무에서 코를 자극하며 진한 꽃향기가 풍겨왔다.
향기에 취해 잠시 발길을 멈추고 보니 키는 2미터 남짓 연보라 색 꽃이 활짝 핀 라일락이었다. 굵거나 혹은 가는 가지에 송이송이 꽃이 매달려 진한 향기고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어린 소녀의 몽실몽실한 꽃 머리핀과 똑 닮은 라일락 꽃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고 나자 한 두 달 넘게 나를 괴롭히던 그 누군가에게 (답정너에 똥고집, 대화중 상대방 말 자르기, 어떤 상황에서도 불통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독하고,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가 1도 없는) 그런 어이없는 행동들에 감정 이입하며 크게 속상해했던 감정적 소모와 스트레스가 단번에 휙 날아가고
아주 오래전 방송됐던 포카리스웨트 광고에 나오는 자전거 타는 여주인공처럼 기분이 상쾌해졌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문세형의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을 흥얼거리고 있다.
라일락에 취하니 유치하게 스무 살 내 청춘을 함께 보낸 담배도 생각이 난다. 하얀 담배 갑에 보라색 이쁜 꽃이 몇 송이 곱게 수 놓인, 고된 막일 아르바이트 후에 잠시 짬을 내어 연기 한 모금 들이마시고 인생 고뇌를 토해내듯 후 하고 불면 끝을 모르고 마음도 한없이 두둥실 떠올랐다. 어렵던 그 시절 주머니 가벼운 고학생을 달래주던 가격이 혜자스럽던 착한 담배였다.
기왕 생각이 난 담배를 찾아 갑작스레 그리운 옛 친구를 찾듯 불편하지 않은 편의점에 들어가 물으니 추억이 묻은 라일락 담배가 표지 색깔만 바뀌어 연보랏빛 라일락 꽃이 활짝 핀 채로 반갑게도 4,000원에 아직도 판매가 되고 있었다.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생각 없이 한 갑 집어 들었다. 왜 샀을까? 그 시절 추억을 산 걸까? 사놓고도 열흘이 지난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편의점을 나서니 곧 완공을 앞둔 25층 고층아파트 공사 현장이 보이고 카페 2개를 지나 주민센터가 있고 얼마 전에 문을 연 내 마음속 자랑 우리 동네 유천 도서관이 나타난다.
도서관은 총 4층 규모이고 공부하는 열람실이 따로 없어 소란하지 않고 조용하며 건물 인테리어가 요즘 세대가 좋아하는 밝은 톤의 카페 분위기이고 옥상에는 미니공원도 있다
한마디로 도서관이 북카페처럼 편안하고 세련되어서 매일 도서관에 들러 책을 읽고 3층에서 바라본 들녘의 매일 달라지는 자연의 풍경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최고의 도서관이다. 고 1 딸과 함께 도서관에 가 책을 고르고 대출하는 재미가 요즘 나의 최애 일상이 되었다. 강아지와 함께한 날은 입장할 수 없어 그냥 지나치는 산책길이지만 다음에는 4층 문화공간에서 펼쳐지는 유명 작가님들 과의 만남도 꼭 참석해 보고 싶다. 도서관을 떠올리면 이유 없이 마음이 늘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다.
토토와 함께 생태공원을 한 바퀴 돌고 300번 버스 종점인 주공 아파크 입구에서 139계단을 오르면 전망 좋은 8 각정 정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토토에게 간식을 던져준다. 펄쩍 뛰어오르며 간식을 낚아채는 활력 넘치는 토토를 보니 내 마음도 함께 건강해진다. 마치 달달한 라테를 앞에 두고 글을 쓸 때처럼.
오늘도 무사히 평온하게 산책을 마치고 귀가를 한다.
건강하고 뭐든 잘 먹는 우리 집 강아지 토토는 그 왕성한 식욕을 주체하지 못해 대파도 먹고 생고구마도 먹고 주방에 보이는 음식이란 음식은 안 가리고 거의 부숴버리는 스타일이라 요리 중에는 절대 자리를 비우면 안 된다.
애완견을 키워본 경험이 전무했던 4년 전 여름, 식탁에 올려둔 치킨 뼈를 배가 터지게 훔쳐먹고 노란 토사물을 토하며 죽을 것 같아 동물병원에 데려가니 수의사가 개복수술을 권했다. 병원비는 70만 원이었다. 나는 애가 너무 어려 수술보다는 약물치료가 나을 거 같아 다른 병원을 알아보고 약물로 치킨 뼈를 녹여 보는 게 어떻겠냐고 의사 선생님께 건의했다. 몇 대의 주사를 맞고 토토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살아났다.
그 난리를 겪고도 워낙 먹는 것을 좋아하는 태생이라 지금도 여전히 식탐은 1도 못 버리고 있다. (걸신들린 것처럼 배고픈걸 못 참고 먹는 걸 탐하는 모습이 누구랑 닮았다)
길가에 핀 연보랏빛 라일락꽃을 만났던 그 순간 나는 어느새 열다섯 살 사춘기 소년으로 돌아가 첫사랑 옥경이를 생각했다. 웃으면 살포시 보이는 보조개와 촌스러운 바가지 단발머리, 그리고 화려한 샴푸 향 대신 소박한 비누냄새가 풍기던 조용하고 차분했던 그녀.
남녀 합반이었던 그때 그녀와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기념할만한 날이라고 값비싼 선물들을 건네기에는 가난했던 그 시절. 그해 생일 그녀는 내게 윤동주 님의 서시가 진하게 각인된 둥근 나무액자를 선물해주었다.
내가 인근 도시로 진학을 할 때까지 우리는 한 4년 정도 만났다.
사랑인지 우정인지 명확한 경계도 없이 서툴고 풋풋한 그 감정들을 가슴에 품고서
얼마 전 동창모임에서 능력 있고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주방에서 카모마일을 한잔 마시며 창밖에 펼쳐진 원불교 교당의 푸르른 수목을 보며 어느새 계절이 이렇게 또 깊어가고 있음을 새삼 느낀다.
한동안 발령과 수리, 각종 훈련과 점검, 새로운 멤버와 팀워크를 맞추느라 좀처럼 글을 쓸 마음과 시간을 다 잡지 못했다.
어느 곳이나 각종 행사가 많은 오월 달. 100톤 경비정 3척 중 1척이 연식이 너무 오래되어 폐선을 하고 난 후 신조함정을 인수하기 위해 대상 함정 직원들은 부산으로 길을 떠났다. 우리 배와 나머지 한 척이 힘든 맞교대 근무 중이다.
전북 부안군 위도 앞바다에서 해상경비를 뛰고 입항해서 육지에 머무는 시간이 짧아서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들은 더욱 애틋하다. 딸의 표현을 빌자면 꼴랑 세밤을 자고 나간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육지에 있는 날은 사람도 만나야 하고 운동도 해야 하고 자질구레한 일부터 아이들을 챙기는 큰일까지 해결할 일들이 많아 항상 바쁘다.
신록이 푸르러 봄이 가고 초여름의 길목에 들어선 지금 이 계절.
라일락과 철쭉이 피었다 지고 지금은 또 동구 밖 과수원길은 아니지만 아까시가 활짝 펴 온 세상에 향기를 내뿜고 있다.
사람 사는 세상도 좋은 향기만 가득하면 얼마나 좋을까? 꽃을 보며 나의 인생은 또 삶은 어떠한지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들 살아가는 날이 맨날 햇볕 쨍쨍한 날이면 좋을 텐데
어느 구름에 비가 들었는지 우산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는 날도 많다.
그럼에도 퇴색하지 않고 고운 향기를 풍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나만의 빛깔을 간직하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