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 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이나 6,25 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1주년 되는 해이다.
큰아버지는 1950년 7월 22일 밤 11시 장흥군 안양면 수문리 앞바다 득량만에서 수장당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지난 4월 7일 부산 연산동에 살고 있는 사촌, 복희 누나한테 전화가 왔다.
6.25 때 좌익(빨갱이)으로 낙인찍혀 억울하게 돌아가신 큰아버지 명예를 찾아 주어야 한다며 장흥군 국민보도연맹 사건(1950년 7월 22일 밤 11시) 관련 민간인 학살 유족으로 장흥읍에 소재한 (사)장흥문화공작소로 유족 인터뷰를 간다고 했다.
누나와 통화 후 태어나서 처음 듣는 가족사 인지라 무슨 일인가 싶어 1950년 장흥 보도연맹 민간인 학살 자료를 검색하고 올해 여든두 살 된 막내 고모(아버지 여동생)로부터 듣게 된 큰아버지의 사연은 이랬다.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49년 6월 이승만 정권에 의해 전국 국민보도연맹이 서울에서 결성되고 국민보도연맹준비위원회 결성식은 1949년 12월 13일 전남도청 회의실에서 개최되었다.
알려져 있듯이 국민보도연맹은 이승만 정부가 국가보안법을 제정 시행하면서 이른바 좌익 전향자를 보호하고 지도한다는 명분으로 결성한 단체이다.
장흥군 국민보도연맹은 1950년 3월 8일 장흥경찰서 앞 광장에서 1천여 보도연맹원과 각 관공서, 사회단체, 중학 상급생 등이 참석하여 결성되었다.
그 시절 글을 좀 깨우치고 나름 인텔리였던 큰아버지를 경찰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장흥군 보도연맹에 가입 시켰다.
1950년 6월, 전쟁이 터지자 장흥경찰이 각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을 관할 지서에 예비검속 하여 수감시켰다. 곧바로 수십 명이 아무런 법적 절차도 없이 예비검속 이란 명목으로 장흥경찰서로 이송된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할머니께서 여기저기 아는 사람을 통해 석방을 시키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7월 22일 밤 11시. 후퇴를 앞둔 장흥경찰은 감금되어 있던 민간인 45명을 여럿이 묶어서 한 트럭에 싣고 안양면 수문리 앞바다로 출발한다. 안양 해창저수지 앞을 지나 이른바 탕수 배기 (산에서 깨끗한 물이 흘러내려 수 있는 웅덩이)에서 아홉 명이 탈출을 시도한다.(기적처럼 살아난 1명의 생존자 덕분에 일부분 진실이 밝혀짐)
탈출 시도자 9명은 경찰의 총을 맞고 사망했다. 물론 시신을 찾지 못했다. 나머지 수십 명의 사람들은 수문리 선창으로 끌려간다. 새끼줄로 묶고 돌멩이를 채워 캄캄 한밤 차가운 바닷 물속으로 강제 수장시켰다.
그때 큰아버지의 나이는 스물다섯 꽃다운 나이었으며 결혼을 해 한창 신혼의 단꿈을 꾸고 있었다. 큰어머니 배속에는 3개월 된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이의 이름을 복희라고 지었다.
큰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조차 모르고 태어난 복희 누나는 그 당시 큰 충격을 받은 큰어머니까지 어디론가 떠나버리자 우리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원래 아버지는 남자 형제가 두 분이 더 계셨다. 큰 큰아버지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다 해수병으로 돌아가셨고 큰 아버지는 그렇게 사망했다.
큰아버지 제사를 우리 집에서 모셨는데 엄마는 누구 제사냐고 물으면 자세히 말씀은 안 하시고 읍내 장에 나가 장을 보시고 정성스럽게 한 여름밤 제사를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