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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나비 Jun 17. 2022

나의 큰아버지

수문리 앞바다 득량만에서 수장당한 민간인들


국민보도연맹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 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이나 6,25 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1주년 되는 해이다.

큰아버지는 1950년 7월 22일 밤 11시 장흥군 안양면 수문리 앞바다 득량만에서 수장당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지난 4월 7일 부산 연산동에 살고 있는 사촌, 복희 누나한테 전화가 왔다.

6.25 때 좌익(빨갱이)으로 낙인찍혀 억울하게 돌아가신 큰아버지 명예를 찾아 주어야 한다며 장흥군 국민보도연맹 사건(1950년 7월 22일 밤 11시) 관련 민간인 학살 유족으로 장흥읍에 소재한 (사)장흥문화공작소로 유족 인터뷰를 간다고 했다.


누나와 통화 후 태어나서 처음 듣는 가족사 인지라 무슨 일인가 싶어 1950년 장흥 보도연맹 민간인 학살 자료를 검색하고 올해 여든두 살 된 막내 고모(아버지 여동생)로부터 듣게 된 큰아버지의 사연은 이랬다.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49년 6월 이승만 정권에 의해 전국 국민보도연맹이 서울에서 결성되고 국민보도연맹준비위원회 결성식은 1949년 12월 13일 전남도청 회의실에서 개최되었다.


알려져 있듯이 국민보도연맹은 이승만 정부가 국가보안법을 제정 시행하면서 이른바 좌익 전향자를 보호하고 지도한다는 명분으로 결성한 단체이다.


장흥군 국민보도연맹은 1950년 3월 8일 장흥경찰서 앞 광장에서 1천여 보도연맹원과 각 관공서, 사회단체, 중학 상급생 등이 참석하여 결성되었다.


그 시절 글을 좀 깨우치고 나름 인텔리였던 큰아버지를 경찰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장흥군 보도연맹에 가입 시켰다.


1950년 6월, 전쟁이 터지자 장흥경찰이 각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을 관할 지서에 예비검속 하여 수감시켰다. 곧바로 수십 명이 아무런 법적 절차도 없이 예비검속 이란 명목으로 장흥경찰서로 이송된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할머니께서 여기저기 아는 사람을 통해 석방을 시키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7월 22일 밤 11시. 후퇴를 앞둔 장흥경찰은 감금되어 있던 민간인 45명을 여럿이 묶어서 한 트럭에 싣고 안양면 수문리 앞바다로 출발한다. 안양 해창저수지 앞을 지나 이른바 탕수 배기 (산에서 깨끗한 물이 흘러내려 수 있는 웅덩이)에서 아홉 명이 탈출을 시도한다. (기적처럼 살아난 1명의 생존자 덕분에 일부분 진실이 밝혀짐)


탈출 시도자 9명은 경찰의 총을 맞고 사망했다. 물론 시신을 찾지 못했다. 나머지 수십 명의 사람들은 수문리 선창으로 끌려간다. 새끼줄로 묶고 돌멩이를 채워 캄캄 한밤 차가운 바닷 물속으로  강제  수장시켰다.


그때 큰아버지의 나이는 스물다섯 꽃다운 나이었으며 결혼을 해 한창 신혼의 단꿈을 꾸고 있었다. 큰어머니 배속에는 3개월 된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이의 이름을 복희라고 지었다. 


큰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조차 모르고 태어난 복희 누나는 그 당시 큰 충격을 받은 큰어머니까지 어디론가 떠나버리자 우리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원래 아버지는 남자 형제가 두 분이 더 계셨다. 큰 큰아버지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다 해수병으로 돌아가셨고 큰 아버지는 그렇게 사망했다.


큰아버지 제사를 우리 집에서 모셨는데 엄마는 누구 제사냐고 물으면 자세히 말씀은 안 하시고 읍내 장에 나가 장을 보시고 정성스럽게 한 여름밤 제사를 모셨다.

 

아들 둘을 어이없고 비참하게 떠나보낸 할머니의 눈에는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자식을 지켜주지 못해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사셨고 불심에 기대어 고단하고 신산한 세월들을 견뎌 내셨다.


민족의 비극이었던 6.25 전쟁이 우리 집안에도 엄청난 고통을 주고 아픈 가족사가 있는 줄 쉰 살이 넘을 때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한 시간 넘게 장흥문화공작소에서 진실 규명을 위한 인터뷰를 마친 복희 누나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내 바람은 꼭 하나다. 피해자 명단에 아버지 이름 석자만 세겨주는것 더이상 뭘 바라겠노."


장흥에도 뒤늦게 민간인 학살 피해자 모임이 발족되고 2021년 12월 22일 수문리 해창리 인근에서 그때 당시 억울하게 학살된 피해자 위령제가 열렸다. 그 피해자 명단에 장흥군 관산읍 죽청리 살았던  큰아버지 이름  석자 김주덕은 아직 없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에 따라 한국전쟁 전후 장흥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자 진실규명 조사 기록 작업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10월은 되어야 결과가 나올 것 같다.


오늘 나는 1950년 7월 득량만 앞바다에서 캄캄한 밤 새끼줄로 세워 차례차례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그 엄청난 공포를 감히 상상할 수 없다.


호국보훈의 달이라는 6월.

명백한 이승만 정부의 학살행위가 하루빨리 진상 규명되어 득량만 푸른 바다에 수장당한 수많은 원혼들이 억울한 한을 풀고 고이 잠들 수 있는 날을 학수고대 한다.


올해  12월, 장흥군 수문리 위령제에는 꼭 참석해 큰아버지의 넋이 나마 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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