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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파랑나비
Jun 21. 2022
고라니를 만났습니다.
나 홀로 야간 백패킹
꼰대와 MZ사이에서 어중간한 낀대가 되어 일과 인간관계에 치이다 보니 어느 순간 삶의 동력이 고장 난 벽시계 마냥 멈춰 서버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락내리락 감정 롤러코스터를 타며 작두날을 타는 만신 무당처럼 위태롭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숨을 좀 쉬며 살고 싶었다.
나만의 안식처를 찾아 떠나자. 캄캄한 밤 20킬로의 배낭을 메고 산속으로 들어가 하늘의 별도 따고 숲의 정령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졌다.
작년 가을 산행을 마치고 다용도실에 처박아둔 백 배낭을 꺼내 침구와 먹을거리를 간단하게 챙겨 서천군에 있는 월명산으로 백패킹을 떠났다.
월명산의 높이는 298미터. 낮아 보여도 야간산행 에다 오르막 길이 계속되니 산행코스가 만만하지 않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힘들게 정상에 도착하니 이미 해가 떨어진 산속은 어둠이 짙게 깔려있다. 헤드렌턴을 쓰고 재빠르게 텐트를 치고 하룻밤 숙영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줄만 당기면 열이 가해져 완성되는 간편식품 비빔밥으로 간단히 저녁식사를 마치고 텐트 밖에서 쳐다본 밤하늘.
내가 아는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아가 보인다. 모르는 잔별들도 무수히 많다. 별들이 함박눈처럼 내 눈 속으로 쏟아진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1시간 넘게 산에 오르니 자연이 내게 주는 선물이다. 이 순간 나는 우주 최강 별 부자가 된다.
밤 열 시쯤 깊은 밤의 적막을 깨고 어디선가 사춘기 소년의 변성기 목소리 톤과 비슷한 “아악” “악”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고라니다. 처음 산행 때는 무서웠는데 고라니임을 알고 난 뒤에는 친숙해졌다.
장난기가 발동해 소리 나는 곳을 향해 무림고수처럼 사자후를 외친다. “네가 직장생활의 고단함을,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아니? ”“니 팔자가 상팔자다 “ 하면서.
몇 번 외치고 나니 속이 좀 후련해졌다. 형체 없는 분노와 미움들을 향해 몇 차례 악을 써대자 10년 먹은
체
증이 가신 듯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고라니 울음소리가 멈추자 불경 천수경을 틀어놓고 명상을 시작한다.
들숨과 날숨을 따라 수많은 인연과 일상의 순간들을 떠올리며 미움보다 사랑이 많은 삶을 살자고 다짐한다.
팩소주를 꺼내 육포를 안주삼아 한잔 쭈욱 들이킨 단전으로부터 뜨듯한 술기운이 온돌방 구들 데워지듯 기분 좋게 서서히 온몸으로 피어오른다.
다음날 새벽, 눈을 뜨니 안개가 자욱하다. 몽환적이다. 깊이 잠들지 못해 몸은 피곤한데 기분은 맑고 상쾌하다.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쭈욱 켜니 밤새 움츠려 있던 관절과 척추뼈 들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제 자리를 찾아간다. 개운하다. 날아갈 것 같다.
컵라면을 먹고 달달한 봉지커피를 한 잔 타서 마시고 비인면 앞바다 풍경을 눈에 담고 뷰를 즐긴 후 터덜터덜 하산을 시작했다.
집 앞 사우나에 가 밤새 언 몸을 뜨거운 물에 풍덩 담근다.
기분 좋은 피로감이 몰려온다. 나른해진다.
뜨거운 욕조에서 고양이처럼 또 온몸을 쭈욱 편다. “아이고 시원하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산속에서 소박하게 먹고 나를 돌아보는 시간.
산은 나에게 쉼을 주고 새로운 삶의 에너지도 주었다.
새로울 것도 신박할 것도 없는 백패킹이 내 삶의 원동력이다.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다면 훌쩍 산속으로 떠나고 볼일이다.
“그날 밤 별 너, 너무 멋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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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가까이 하며 살고있는 사내입니다 기억에남는 현장일화, 소소한 일상을 써볼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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