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의 특별한 만남
절친 직장 동료의 어이없는 만행에 충격과 분노로 마음 한 자락을 깊이 베었다. 투철한(?) 직업정신을 바탕으로 한 그의 집요하고 예의 없는 행동은 꽤 오랜 시간 동안 내 삶을 통째로 부숴버렸다.
망나니처럼 설쳐대는 꼴이 보기 싫고 글꼴을 보며 마음과 다르게 애써 웃음 지며 아무렇지 않은 듯 그 사람을 대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장마가 잠시 주춤거리던 날 당직 후 퇴근길에 달 빛이 밝다는 내변산 깊은 곳 월명암으로 무작정 길을 떠났다.
내변산 남녀치 에 주차를 하고 1.9km라는 이정표를 확인하고 커피 한통 들고 무작정 산을 올랐다.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가는 내내 다행히 큰비는 오지 않고 약간 흐린 날씨는 무덥지 않아 좋았다.
다만 생전 처음 가보는 산길이 계속 오르막 길이라 힘들었다.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오르는 산이라면 한 시간 남짓이면 충분히 도착했을 텐데 전날 당직을 서고 깊은 잠을 못 자 피곤해서 중간에 자주 쉬었다.
우습게 보고 산길을 오르기를 1시간 남짓. 체력이 방전되자 꽉 낀 청바지가 땀에 젖어 질척거렸다. 간단한 간식과 물 한병도 제대로 챙기지 않고 대책 없이 산행을 택한 나 자신을 원망했다.
찻길이 없는 월명암은 수행자의 마음으로 등산 장비를 갖추고 힘들게 산길을 올라야 모습을 보여주는 수도 도량이다. 오르는 내내 산행을 포기하고 다음을 기약하고 싶었지만 꾸역꾸역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기어이 산사에 도착했다.
한여름 산사는 온통 초록으로 뒤덮여 있었다.
대웅전 앞 커다란 삽살개 연화가 낯선 길손을 보고도 짖지 않고 그저 무심하게 쳐다본다. 새벽 예불을 올리는 스님의 독경소리에 개도 성불을 했나 싶었다.
대웅전에 들어가 부처님을 참배하고 비켜간 인연들이 마음에 걸려 수없이 절을 하며 한참을 참회했다.
법당을 내려와 요사체에 다다르니 지친 길손들을 위해 커피믹스와 콩사탕이 마루에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다.
안쪽에서 스님 한분이 나오신다. 주지 운천 스님이시다.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짓고 처음 본 길손을 반갑게 맞아 주셨다.
“허 귀한 손님이 오셨네. 더운 날씨에 오시느라 애썼소”
점심공양 시간인데 찬은 없어도 좀 드시겠습니까? “ 하신다.
산을 타느라 지치고 허기가 져 있던 터라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염치없지만 그리 하겠습니다.”
교통이 불편한 절이라 평소 공양주 보살님도 없이 스님 혼자 식사를 해결하시는 것 같았다. 찬장에서 라면을 두 개 꺼내 끓여 주셨다.
별다른 찬도 없이 묵은지 한 접시, 된장에 풋고추 몇 개가 전부인 소박한 산사의 상차림이었다.
“후루룩” 한입 삼키니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은 개운한 국물과 탱글한 면발이 입에 착 감긴다.
길손의 시장함과 산사의 넉넉한 인심이 라면에 들어간 것일까? 이날 끓여주신 주지 스님표 특제 라면은 뭔가 특별했다. 기분 좋은 맛, 행복해지는 맛 깊은 산속 라면 맛집이었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국물까지 싹 비우고 설거지를 재빠르게 마치고 뒷정리를 했다.
잠시 후 마루에 나가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물었다. “스님! 어째서 세상 모든 것들은 변하는 걸까요? 늘 한결같으면 참 좋을 텐데요. “
사람 좋게 웃으시더니 “불가에서는 상이라 합니다. 혹시 제행무상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본디 천지 만물은 모두 다 변하는 것이니 변했다고 서운해 말고 어렵더라도
변해버린 대상을 보듬고 나 자신을 상대방에게 맞춰주려고 노력을 해보세요. 그렇게 하면 덜 서운하고 노여움도 적게 일어날 겁니다. “ 하신다.
스님과 대화를 마치고 절간 앞마당 큰 전나무 밑 너럭바위에 걸터앉았다. 건너편 푸른 숲을 바라보며 해주신 말씀을 수없이 되뇌어 보았다.
내변산 월명암 대웅전
필부인 내가 당장 실천하기는 어렵겠지만 마음먹고 자꾸 노력하면 조금은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일상으로 복귀하는 순간 또다시 사바세계의 격랑 속으로 휘말리고 말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뭔가 개운했다.
예상치 못했던 스님과의 만남 그리고 산사의 라면 한 그릇이 특별했다.
한 끼 밥 값으로 대웅전 기도부에 가족 이름을 올리고 성의껏 시주를 했다.
절 입구까지 따라 나오시며 미소를 지으며 합장을 하시는 스님께
시간 내서 다음에 꼭 다시 찾아뵙겠다 작별했다.
사는 게 이유 없이 헛헛하고 괜스레 눈물 나는 날.
내변산 월명암으로 떠나보시라. 고요한 산사에서 잠시 머물며 가마솥 끓듯 일어나는 마음들을 내려놓고 낙조대로 떨어지는 서해 일몰을 가슴에 품어보라.
힘찬 삶의 에너지가 솟아오르고 가슴은 한없이 웅장해진다.
무엇보다, 운이 좋으면 주지스님표 맛있는 인생 라면도 한 그릇 드실 수 있다.
청량한 산바람을 마시며 지천에 핀 마거리트 데이지 꽃을 눈에 담고 기분 좋게 산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