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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올라 미운 오리

검은 백조면 또 어때?

by 파랑나비


“쿵 자라 작작 삐약삐약, 오리 오리 꽥꽥”

오리지널 : 오리도 지랄하면 날 수 있다.

오리를 떠올리면 함께 울리던 어린 시절 내 맘속 주크박스


날아오르지 못한 세상의 모든 평범한 오리들에게 용기를


사자암 정상에서 내려다본 금마저수지는 그 모양이 꼭 한반도 지형을 닮았다.

가뭄에도 수량이 넉넉하여 농사짓는 모든 이들을 평안하게 안아주는 엄마의 품 같은 저수지.

그위에 극락암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 극락암에서 40년째 암자를 지키고 있는 주지스님 만허. 작달막한 키에 다부진 어깨와 송충이처럼 새까만 눈썹이 인상적이다.

출가하여 수도승으로 살고 있지만 산사를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차 한잔을 마주하고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매미가 악을 쓰며 울던 8월의 어느 날,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암자 뒤편 석불 속 미륵부처님의 온화한 미소가 어느 때보다 신비롭게 빛나는 아침이었다. 거사 한 명이 암자를 찾아왔다.


"스님! 저는 올해 51살 된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먹고사는 게 무엇이고 인연은 또 무엇인가요?

죽어야 사는 오리. 그게 요즈음 저예요. 21년째 회사에서 죽고 있죠.

업무 스트레스와 상사들의 날카로운 부리에 쪼여 성한 곳 없이 온통 상처투성이입니다. 저에게는 상사들 입속의 혀처럼 구는 재주도 없고,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고 끈끈한 인맥은 더더욱 없어 항상 조연으로 살고 있습니다.

힘든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또 어떤가요?

TV 시청을 하면서 늘 화난 사람처럼 인상 쓰며 앉아있는 아내 용돈 필요할 때 나를 찾고 아빠가 와도 방문도 열어보지 않는 사춘기 아이들. 모든 것들이 저를 슬프게 하고 화나게 합니다.



세상과 그들은 저에게 말하곤 합니다.

”자 보라고 저게 세상이야 사람이나 짐승한테 특별한 관심을 끌어. 몸을 털어 발끝을 안으로 돌리지 말고 교육을 잘 받은 오리는 발끝을 밖으로 돌린다. 부모가 하는 것처럼 이렇게 그러니까 이제 목을 숙이고 꽥 꽥 소리쳐봐 “

저도 남들처럼 세상을 향해 자신 있게 소리치고 싶은데 쉽지가 않네요. 크고 당찬 소리가 나오질 않아요. 동료들은 진급도 제때 잘하고 연봉 계약도 일사천리로 끝나는데 만년과장인 전 자꾸 작아지기만 합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모두에게 인정받는 성공한 어른 오리가 될 수는 없는 건가요?

한평생을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세상에 내편은 하나도 없고 어디 한 곳 기댈 데가 없습니다. 공중에서 외줄 타기 하는 서커스단 곡예사처럼 하루하루가 너무 위태로워요. 제 꼴이 마치 시궁창에 처박혀 버둥거리는 늙은 오리 같다고요

”허허 날지 못하는 미욱하고 가여운 늙은 오리 한 마리가 암자로 기어들어 왔구먼 “ 스님이 혀를 끌끌 찬다.


거사의 짠한 넋두리

넘치는 축복 속에 울음소리도 우렁차게 나 태어났네

넉넉한 살림이 아니었어도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이 있었고

동기간 끈끈한 우애가 있던 정든 시골집

윤기 나는 얼굴, 균형 잡힌 몸, 멋진 목소리,...

물 맑은 개울가에서 물놀이하며

근심 없는 하루를 보냈지

학창 시절 보통이었던 학업성적

가슴 설레던 풋풋한 첫사랑

하굣길 변함없이 날 반겨주던 큰 백구와 엄마의 따뜻한 품

고단한 삶에 지쳐도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가족들의 한결같은 믿음과 응원 덕분이었네

50년 세월 지나 거울 앞에 내 모습 비춰보니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칼은 흰서리 내려있고,

듬성듬성 빠진 머리숱은 휑하고 앞머리는 번들번들,

고운 얼굴은 잔주름이 가득하고 탄탄하던 배는 뿔 룩 뿔 룩.....

밝고 건강했던 아기오리는 뒤뚱뒤뚱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진흙탕 속을 헤매는 노쇠한 늙은 오리 되었네.

돌아보니 눈물이요 앞을 보니 첩첩산중이라.

아! 야속하고 무정한 세월이여


"제 생이 이럴진대 죽기 전에 한 번쯤 날아오를 수 있을까요?" 스님!

"그거야 뭐.... 그래, 거사는 날아오르려고 무엇을 했는가"?

스님이 무심하게 깊은 눈빛으로 거사를 쏘아보며 말한다.

”덧없이 흘러간 지난 세월 돌아보지 말고 그렇게 흘려보내시게 산다는 건 그래도 참 좋은 일 아닌가? “ 금수저 흙수저 타령 말고 인생 2막을 위한 준비를 잘하시게나 하나씩 천천히.

혹독한 겨울과 긴 고난의 시간을 이기고 나서야 아름다운 백조가 되어 날 수 있었던 미운 아기 오리처럼



거사도 허전하고 까닭 없이 눈물 나는 시간들을 잘 견디고 이겨내시게.

어쩌면 거사는 지금 중년이라는 나이가 힘든 게 아니고

중년을 따라다니는 편견이 힘든지도 모르지. 세상사 다 마음먹기 나름이라네

옷차림은 단정하게, 자세는 반듯하게, 포근하게 미소 짓고, 온화한 말투를 실천하며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릴 수 있다면 지구 상에서 가장 멋진 힙한 중년 오리가 될 수 있을 걸세.

오고 가는 인연에 너무 집착 말고 나 자신에게 집중하다 보면 언젠가 아름다운 백조가 될 거야 반드시.

「서로 사귀는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기고

사랑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르는 법이다.

연정에서 근심 걱정이 생기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 중에서


스님! 저는 지금까지 오리로 태어난 평범한 삶을 열심히 살지 않고 준비도 하지 않으면서 백조가 되기만을 꿈꾼 게으르고 미욱한 오리였던 거 같아요

오리면 어떻고 백조면 또 어때요? 그저 나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다 보면 언젠가

하얀 백조든 검은 백조 든 멋진 모습으로 한 번쯤 날아오르지 않을까요?

적금처럼 소중히 하루하루를 모으다 보면 빛나는 날이 오겠죠?

스님 덕분에 부족한 저를 돌아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아름다운 백조로 성장할 수 있도록 다시 한번 힘차게 달려보겠습니다.


법당에 참배를 마치고 돌아온 그날 밤 거사는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미륵 부처님과

달빛이 두루 비추는 대웅전 지붕 위로 눈부시게 하얀 백조 한 마리가 하늘 높이

훨훨 날아오르는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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