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우물

그 우물 물맛이 그립다

by 연오랑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는 것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특히 어린 시절 추억들은 즐거움이던 슬픔이던 세월이 지나고 보면 그 한 장면 한 장면이 영화요 수필이요 시다.

50년 전 내가 태어난 고향집과 마을은 언제 보아도 드라마 세트장이요, 연극의 무대와 같은 곳이다. 눈이 오는 겨울이면 겨울 인대로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이면 여름 인대로 그곳에서는 끊임없이 공연이 펼쳐지고 드라마의 한 장면이 촬영된다. 물론 그 인공은 당연히 나다.

이 골목에서는 공놀이 광경이, 저 골목에서는 막대 치기 광경이, 저 집 마당에서는 제기차기 시합이, 이 집 마당에서는 말 타기 놀이가 펼쳐진다. 누가 이기던 상관없이 늘 마지막은 얼굴에 웃음이 끊이지 않는 해피엔딩이다.

내 고향 ‘도기야’ 마을도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그 옛날 연오랑세오녀 설화의 주 무대 이기도 한 내 고향에는 그래서 그 어느 마을보다 이야기가 많고 마을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설화만큼이나 드라마틱하다.

설화에도 일월지의 우물가에서 비단 옷감을 빨고 말리던 이야기가 등장하듯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내던 때에도 마을 한 복판에는 우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80여 호의 집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던 우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우물물이 마르지 않을 만큼 지하수 수맥을 제대로 찾아 자리를 잡은 우물이었다. 아마 신라시대 이후 2천여 년 동안 마을 사람들의 유일한 우물이었으리라 짐작한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우물은 조선말까지는 우물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조 씨 집안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어느 해 지독한 가뭄이 들어 시냇물이 마르고 바위틈 샘물마저 마르자 조 씨 집안의 어른이 우물을 아예 동네 사람들에게 개방했을 뿐 만 아니라 담장의 경계도 집안으로 물러 우물이 말 그대로 마을 공동우물이 됐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그 어른의 뜻을 받들어 공동으로 관리하며 물을 가지고 다투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어릴 때도 우물물을 길러가기 위해 물통들이 길게 줄을 서 순서를 기다리게 있었고 덩달아 물을 길러러 온 아낙들도 그 막간을 이용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동네에서 일어나는 시시콜콜한 정보들을 주고받았다. 그 우물은 한마디로 동네 사람들의 소통 공간이요 커뮤니티 역할을 톡톡히 했다.

초겨울 김장철이면 우물가에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80여 호 대부분이 이 우물물을 이용해 김장을 했으니 초겨울 한 달 내내 김장이 펼쳐졌다. 마음 맞는 집끼리 3,4가구씩 조를 짜 김장을 시작했는데 당연히 안식구들의 출신과 취향에 따라 김치 맛이 다른 각양각색의 김치가 탄생했고 그때마다 마을 꼬마들은 맛을 보느라 입가가 생쥐를 잡아먹은 듯 빨간 고추양념이 씻겨질 날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서울식 김치와 충청도식 김치가 제일 입맛에 맞았는데 그때 추억 때문인지(?) 나는 그 많은 경상도 아가씨를 마다하고 충청도 아가씨를 만나 결혼했다.

무더운 여름철에는 항상 수박 파티가 열렸다. 몇몇 집에서 수박과 참외 농사를 지은 덕택에 하루가 멀다 하고 수박 파티가 이어졌다. 차가운 우물물에 수박을 담가 둘 수 있는 천연 냉장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상시에도 요긴했다. 초가지붕에 불이 났을 때는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줄을 서 물을 전달받아 불을 껐다.

하지만 우물은 곤욕을 치를 때도 있었다. 동네 아낙들이, 동네 처녀 총각들이 우물가에 나

와 마음 놓고 나눈 말들을 고스란히 듣고만 있어야 할 뿐 비밀을 지켜줘야 했기 때문이다.

간혹 속이 상해 찬 냉수를 들이켜야 하는 상황이 오면 기꺼이 냉수 한 사발 울 내어 줬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는 비밀을 대나무 밭이 아닌 우물 속에다 대고 고함을 질러도 우물은 꾹 참고 비밀을 지켜줬다. 그 덕분에 2천여 년 동안 그 마을 사람들의 불평과 불만, 비밀까지도 모두 간작하고 있는 우물은 그래서 초겨울이면 하얀 한숨을 내쉬며 신세타령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물이 가장 곤욕스러울 때는 우물에 어린아이를 빠트려 순장을 했던 신라시대 때였다. 동네 사람 모두 나와 마을의 안녕을 바라던 그 시절이었으니 만류도 못할 형편이었으니 우물은 오죽이나 답답했겠는가?

우물은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에 똑같은 아픔을 겪었다. 비록 순장의 풍습을 따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물물에 5살 난 어린아이가 빠져 숨을 거둔 일이 있었다. 추측컨대 우물 안을 쳐다보려던 아이가 거꾸로 떨어져 일어난 참사인데 그런 일이 있은 후 동네 사람들 중 일부는 그 우물을 메워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우물의 시련기였다. 하지만 그 우물이 무슨 죄가 있느냐는 마을 어른들의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어 폐쇄보다는 높이를 높이는 방향으로 합의를 이끌어 냈다. 그 후론 우물물은 사람 손에 전적으로 의존해 퍼 올리던 것을 도르래를 달아 끌어올리는 약간의 시설 개선이 이루어졌다.

나 또한 우물을 가끔 이용했다.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반대로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때면 달려가 큰소리로 우물 속에다 대고 노래를 불렀다. 우물 속이 울려 못 부르던 노래도 마치 잘 부르는 듯이 감싸 안아줬기 때문이다. 음치인 나의 노래를 들어준 그리고 에코까지 넣어 재편집해 준 우물에 고마울 따름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 동네에 제2우물이 탄생하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그 장소는 다름 아닌 우리 집 안이었다. 동네 우물이 마을 중심부 낮은 지점에 위치했지만 우리 집은 약간 높은 지점에 위치해 있어 우물을 파기에는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베이비붐 시대를 맞아 마을에 주민수가 늘어나고 용도 또한 늘어나자 제2의 우물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우물과 멀리 떨어지고 무엇보다 우물을 팔 형편이 되는 집을 찾다 보니 우리 집이 선정됐다. 예상했던 대로 난관이 찾아왔다. 기존 우물의 깊이가 대략 7m가량이었으나 우리 집 우물은 10m를 족히 파 내려가도 물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주위 사람들은 물이 안 나오는 곳이라며 포기할 것을 종용했으나 고집스러운 우리 아버지의 뚝심으로 2m를 더 파내려 가자 물이 솟기 시작했다. 덕분에 깊은 우리 집 우물은 더 시원하고 양이 많아 우리 집안 6가구가 쓰기에는 충분해 근처 이웃들과 나눠 쓸 수가 있었다.

우물이 생기고부터는 6가구의 생활이 우물 중심으로 바뀌었다. 우물가에는 나를 위해 미니 수영장도 생겼고 미니 원형극장도 생겼다. 겨울철을 제외하고는 온 집안 식구들의 공동 취사장 겸 식당이 됐다. 그 덕분에 외동아들로 태어난 외로움을 모르고 자랐고 집안사람들이 친 동기간보다 더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니 지금에서 생각해 보면 우물은 내게는 큰 은인이나 다름없다.

최근에는 마을마다 공동으로 사용하던 우물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세상이 됐으니 필요 없을 만도 하다. 하지만 수천 년을 이어 온 우물 문화가 없어진 것에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50여 년 만에 돌아본고향 마을 그곳에는 우물이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겠지만 메워지고 없었다.

기회가 된다면 그 우물 주위에서 추억을 쌓았던 친구들의 의견을 모아 복원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국가에는 국가지정 문화재가 있어 복원하고 가꾸고 있지만 그 우물 역시 우리 모두에게는 문화재와 같은, 귀중한 공간이었다.

그 우물 물맛이 그립다. 고향마을, 고향집이 그립다.

이제 갓 예순일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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