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이 들수록 너그러운 사람이 돼야 한다
인간은 길지 않은 생을 산다. 동물들 중 하루를 사는 곤충도, 10여 년을 사는 개와 고양이도 있다. 물론 거북이라는 동물은 100년도 넘게 살기 도하지만 인간만큼 오래 사는 동물도 드물다.
긴 삶이란 그 살아 있는 동안 필연적으로 많은 인연을 만들기도 하고 또 그 인연을 토대로 사랑과 추억이라는 낱장 벽돌로 견고한 성을 쌓기도 한다. 그 삶에서는 아름다운 추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불행이 찾아오기도 하고 때로는 좌절의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특히 건강을 잃어 죽음이란 또 다른 세계가 강 건너편에 손을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때는 평소에는 가져보지 못하던 생각을 하게 되고, 삶을 뒤돌아보는 시간 또한 많아진다. 줄기를 당기면 줄줄이 딸려 나오는 고구마와 같이, 그 고약한 추억이라는 녀석은 머뭇거림이 없다.
머리가 하얀 백발의 윤 씨 할머니는 병원에서 선생님으로 통한다. 젊은 시절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고 퇴직 시에는 교감선생님으로 계셨다. 내 옆자리에서 투석을 받는 4시간여 동안 잠시 잠들 때를 제외하면 팔순이 넘은 연세에도 기억도 또렷하고 말씀도 곧 잘하신다.
그 할머니가 혼수상태에 빠져 저승 문턱에 갔다 온 이후의 일이다.
할머니는 투석을 받는 동안 수시로 일어나 앉아 몸단장을 하신다. 2,3일에 한번 꼴로 다녀가시는 할아버지가 투석실에 들리시는 날에는 머리손질뿐만 아니라 약간의 화장까지 하시며 할아버지를 기다리신다. 환자복을 입고 계시지만 않으면 누구도 할머니가 환자라고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정도다.
어느 날 이런 모습을 지켜보건 내가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할머니는 왜 그렇게 꽃단장에 신경을 쓰세요? 할아버지가 아직도 그렇게 기다려지세요?”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고개를 끄떡이신다.
“내가 죽고 난 뒤에도 우리 할아버지 머릿속에 꾀죄죄하고 지저분한 여자로 남기는 싫어. 항상 깔끔한 여자로 기억되고 싶어”
해가 바뀌었으니 그 할머니가 돌아기 신지도 어언 6개월이 다 되어 간다.
항상 그 자리에 누워계시던 할머니가 생각날 때마다 나는 내 옷매무시를 다듬으며 몸단장을 한다. 특히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딸아이들이 오는 날이면 나는 더욱 몸단장에 신경을 쓴다.
병원 인근 이발소에 들려 머리를 손질하고 면도도 한다. 간호사에게 부탁해 환자복도 게 중에서 가장 말짱한 옷으로 부탁하곤 한다.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자식들에게 꾀죄죄한 아빠로 기억되기 싫어서이다.
근자에 들어서 내 몸 상태가 안 좋아 입원이라도 며칠간 해야 할 지경이 되면 나는 생각이 더욱 많아진다. 내게 불어 닥친 가장 큰 변화는 모든 일에 더욱 너그러워진다는 점이다. 나 스스로 생각해도 참으로 예상치 못한 변화다.
신부전 말기라는 고약한 병이 들기 전 나는 한마디로 까탈 서럽기로 유명했다. 한평생 언론인으로 살아온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불의나 적폐를 보면 참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00 기자가 다녀갔다”는 소리만 들으면 그곳은 초비상 상태에 빠진다.
권력으로 눌러도, 돈으로 매수를 하려 해도, 향응이나 접대를 하려 해도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래된 지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무조건 잘못했으니 한 번만 봐달라고 사정해 보라”는 말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이었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정리정돈이 안됐거나, 휴일 날 혹여 늦잠을 자도 난리가 날 정도였으니 집사람이나 아이들은 늘 긴장을 하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건강을 잃어 병원을 제집 들락 거리 듯하고 병원에서 그 할머니를 만나고부터는 180〫〫〫°로 생각이나 행동이 바뀌어 영 딴 사람으로 변했다.
어느 봄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그 할머니는 내게 커피 한잔을 권하며 이런 말을 걸어왔다.
“자네도 나처럼 참 고지식하게 생겼어. 주위 사람들이 참 피곤하겠구먼...”
그 당시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조금 친해지고 나서부터는 모두 다 공감이 가는 그런 말들이었다.
할머니는 우선 주위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사람이 돼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특히 병을 얻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경우 까탈스럽게 군다면 주변 사람들이나 가족들에게 ‘무난한 사람’으로 기억되지 못해 저승에 가서라도 발을 편히 뻗고 잠을 청할 수 없을 것이라는 대목에서는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그렇다. 한 번의 실수를 너그럽게 용서하지 못하고 잠시 울컥하는 마음조차 다스리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이 어찌 좋은 남편, 좋은 아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선한 이웃이라 할 수 있을까?
또 한 가지 변화라고 한다면 딸아이들을 위한 배려심이 커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들과는 달리 딸아이들의 경우 혼처를 정해야 하고 시댁 식구들을 만나야 하니 내가 평소 해온 고집대로 행동할 수는 없는 일이다.
‘00 아빠는 참 나쁜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면 아빠로서는 참 곤란한 일일 테니 말이다.
“저승 문턱에 다녀오면 새로운 인간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는 어느 노스님의 말처럼, 병마와 싸우는 요즘만큼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 틈에 내 삶을 뒤돌아보고 또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뇌리에 ‘좋은 사람’으로 기억될 준비까지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은 다름 큰 수확이다.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볼 때마다 미소를 띠게 되고, 아옹다옹 다투는 부부를 보면 웃음이 나고, 병실이 떠나갈 듯 떠들며 장난을 치는 아이들을 봐도 마냥 즐겁기만 한 변화는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삶과 죽음의 경계에 걸터앉아 옻 매무시를 가다듬는 시간이 즐겁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