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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오랑 Jun 12. 2023

#시가 있는 여름(109)-기억상실

기억상실

                         재환

때로는 소주가 쓰다

실연당한 친구가 옆에 있으면

사랑한단 고백도 못한 얼간이가 옆에 있으면

혀는 소주의 도수를 높게 평가한다     

소주가 있는 세상에서는

기억은 편리할 때만 또렷하다

돈을 빌려 달라는 녀석 앞에서 기억은 사라지고

꼬불꼬불 집으로 가는 길은 기억이 지배한다

기억을 잃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사랑했던 사람을 두고 떠나는 길

내가 먼저 떠났는지, 웃으며 떠났는지, 울며 떠났는지

기억을 아예 상실하고플 때가 있다     

사거리 모퉁이 벽화는 기억이 있을 때 그려졌으리라

눈 마주치며 웃으면 기억은 사라지고

흙탕물이라도 튀겨 잠시 눈 감으면 기억은 살아난다     

그래 내일은 그대의 생일이야

그대 생일 다음날은 아버지의 제삿날이야

기억은 혼자서 지탱하며 감당하는 것이 아니야 

누구는 밟고 누구는 자빠뜨려야 또렷해지는 거야     

나는 머리가 하얘지는 쾌감을 원해

머리가 멍해지는 충격을 원해

기억상실은 그 틈에 찾아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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