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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오랑 Jun 29. 2023

#시가 있는 여름(119) 흑백텔레비전

흑백텔레비전

               재환                      

함석대문 앞에 며칠째 버려진 흑백텔레비전 한대

용도가 폐기된 물건이 다 그렇듯

주인도, 지나가는 고물상도 관심두지 않는다

주인은 새로 들인 컬러텔레비전이 뿜어내는 화려함에 취한 탓에

고물상은 흑백 TV를 수출할 후진국도 더 이상 없다며 찬밥 취급이다

허리 굽은 노인이 가던 길 멈추고 여기저기 채널을 맞춰 보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 옛날 그 연속극은 나오지 않는다

늙으면 사람이나 기계나 취급을 못 받기는 뫼 한 가지

지나가던 개가 한쪽 다리를 들어 오줌세례를 퍼붓는다

취객은 발길질도 예사다

밤안개가 낀 날 몰래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수십 년 차지했던 자리가 며칠 새 낮 설다

새 텔레비전은 떡하니 벽면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다

결코 욕심 내지 못했던 공간이다

꼬리를 뽑아 콘센트에다 연결하고 방을 나선다

오후 5시, 기억을 끄집어 내 애국가를 틀어 놓는다

그래도 돌아보는 이 없다

지친 흑백텔레비전은 제 성질을 못 이겨 화면을 휘젓는다

물러설 때가 됐다는 것을 저 혼자만 몰랐다

재활용 수거차가 일주일 만에 흑백텔레비전을 수거하러 왔다

그는 반갑게 적재함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는 잉골라에서 제2의 생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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