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여름(127) 우산으로 가려진 얼굴

by 연오랑

우산으로 가려진 얼굴

재환

한 노인이 길을 걷고 있었다

손에는 지팡인지 우산인지

늘 뭔가를 들고 다녔다

새벽녘에 마주쳐도 한낮에 마주쳐도

그 노인의 오른손에는 항상 막대가 들려있었다

그 노인에게서 지팡이는

액세서리였고 패션의 완성이었다

어느 비 오는 날

버스정류장에서 마주친 노인의 손에는 지팡이가 없었다

그 지팡이는 어느새 우산으로 둔갑해

노인의 머리 위를 받치고 있었다

난 호기심에 우산 속으로 뛰어들었다

노인의 우산은 두 사람이 쓰기에도 넉넉할 만큼의 크기였다

맑은 날 지팡이는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비 오는 날 우산은 남을 위한 배려였다

우산들이 지하철역으로 빨려 들어간다

젊은이들의 우산은 자기만을 위한 우산크기다

노인 우산의 절반만큼이다

곧 비는 그칠 것이다

우산을 접은 뒤 나타나는 민낯의 표정은 제각각일 터

나도 이제부터는 넓은 우산을 들참이다

우산 속에서 보았던 노인의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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