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백년해로

할머니의 자서전

by 연오랑

내가 매주 3번 들리는 종합병원 인공신장실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환자가 많다. 신부전은 병의 원인이 주로 고혈압과 당뇨병에서 오는 경우가 많아 평소 건강관리를 소홀히 하거나 약을 잘못 복용한 경우, 또는 유전적 요인으로 잘 발병하는 병이다.

“젊은 사람이 어쩌다 이런 몹쓸 병에 걸렸니?"

옆 병상에 누워 투석을 받던 할머니가 아는 체를 했다. 여든에 가까운 이 할머니를 처음 만난 것은 1년 여가 다 되어 간다. 평소 말수가 적고 옆 사람이 무어라고 말하면 잔잔히 미소만 짓던 할머니 인지라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것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할머니께서는 잘 견디고 계시는 것 같아 반갑네요”라며 인사를 건넸다.

그 후 물꼬가 터지듯 할머니는 투석을 받을 때마다 30분은 족히 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80여 명의 투석환자 누구와도 없던 일이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 교편을 잡았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할아버지는 중학교 선생님으로 당신은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부부가 30녀여간을 선생님으로 지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할머니의 얼굴에는 아직도 선생님 분위기가 났다. 둘째 딸이 교대 졸업반이니 할머니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말을 터놓기 시작한 지 3개월여 되던 어느 날이었다. 할머니는 내게 두터운 공책 한 권을 내밀었다.

“김 국장 자네는 글을 쓰는 사람이니 이 메모장을 보며 내 자서전을 써 줄 수 있겠나?”라고 물었다.

그 메모장에는 자서전을 쓰기 쉽게 할머니의 주요 대소사와 제자들과의 즐거웠던 일 그리고 특히 할아버지와 행복하게 보낸 신혼생활과 즐겁고 행복했던 때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대로 책으로 펴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나는 흔쾌히 “예”라고 대답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나는 밤을 꼬박 새우며 할머니의 메모장을 읽어 내려갔다. 전체 흐름을 파악해 무엇을 주 콘셉트로 내세울까를 정하기 위해서 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할머니의 일생이 궁금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솔직한 말일 것이다.

할머니는 초등학교 바로 앞 블록에 위치한 중학교 국어 선생님인 할아버지와 비밀 연예를 하던 2년여간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숨바꼭질 데이트를 즐겼다. 해가 긴 여름철에는 퇴근 후 자전거를 타며 데이트를 즐겼고, 주말에는 남들의 눈에 띌까 봐 포항에서 경주까지 가서 데이트를 즐겼다고 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할머니 할아버지의 부부생활에도 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서른을 갓 넘겼을 무렵 중학교에 새로 부임해온 미술 선생님이 할아버지가 유부남인지를 알면서도 호감을 가져 할머니 애간장을 녹이곤 했다고 한다.

결혼한 지 10년이 다되어 가도록 아이가 없어 시어머니로부터 퇴직 압력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술을 좋아하던 할아버지가 병을 얻어 병실에 누워있을 때와 집에서 요양을 하며 2년여 동안 휴직을 해야 했을 때는 구구절절이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묻어 있었다.

메모장을 받은 지 보름 만에 대략의 자서전이 완성됐다. 그 자서전 뒤 부분은 물론 공란인 채로 비워 놓았다.

“ 할머니 뒤 공란은 제가 언제 다시 채워 넣을 께요”라는 말에 할머니는 금방 그 뜻을 알아 체고 “ 그렇게 꼭 해줘”라고 답 하셨다.

그날 이후 나는 할머니를 모시러 오는 할아버지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젊은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할머니를 끔찍이 아꼈다. 내가 할머니의 자서전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숨긴 탓에 간혹 병간호의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젊은 시절 자신을 위해 너무 많은 희생을 했다며 지금의 투병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최근 며칠 전부터 할머니의 병세가 눈에 띄게 나빠졌다. 연로한 연세 탓에 힘든 투석을 견뎌 내기가 점점 더 힘에 부치는 듯하다. 할아버지의 병간호도 덩달아 점점 힘들어지고 있고 한숨소리 또한 깊어지고 있다.

그때마다 남녀가 부부로 만나 백년해로한다는 것의 의미를 곱씹어 보게 된다.

곧 할머니의 자사 전의 뒤 부분을 채워 넣어야 될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는 재주가 있는 내가 요즘만큼 자랑스럽고 보람 있을 때가 일찍이 없었다. 더불어 우리 부부의 백년해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고 있다. 잠든 집사람 볼에 가만히 입맞춤을 해본다.

* 이 글은 2016년 10월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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