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영면하세요
“할머니 밝고 편안한 세상에서 영면하세요”
영정사진 속의 할머니는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머리에는 비녀를 꽂고 계셨고 얼굴에는 조용한 미소를 짓고 계셨다. 할머니 영정 양쪽에는 나를 대신하려는 듯 초물이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주위에서는 아흔이 넘으셨으니 호상이라며 호들갑을 떨지만 내게는 40여 년 전의 그 할머니로 멈춰있었다.
상주도 없고 찾아올 문상객도 많지 않은 동네 상을 치르고 있는 처지임을 잘 알기에 할머니의 영정 앞에 앉아 한참이나 옛일을 떠 올렸다. 그 순간마다 양초는 할머니의 기구한 인생살이를 모두 아는 듯 연신 자신을 태워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어릴 적 나는 두메산골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교적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살았다. 우리 동네에도 전기가 들어와 대낮같이 불을 밝히고 사는 집은 몇 집 되지 않을 정도로 전기가 막 들어오기 시작한 과도기쯤으로 여겨진다. 특히 동네 끝집 대나무집 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에는 가장 늦게 전기가 들어왔다. 그 할머니는 텃밭 농사일 외에 특별히 하는 일은 없지만 지금 생각하면 ‘점쟁이’였던 것 같다. 우리 할머니보다는 나이가 15살가량이나 적은, 지금으로 따지면 아주머니와 할머니의 경계에 있는, 50대 후반쯤 되는 젊은 할머니였다. 이 젊은 할머니가 바로 우리 할머니의 말벗이자 친구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할머니는 가끔 이 젊은 할머니 댁에 심부름을 시켰다. 대낮 심부름은 그런대로 할만했지만 곤혹인 것은 어두워진 후의 심부름이 문제였다. 특히 이 집에 가려면 50m가량의 대밭을 거쳐야만 했다.
사각사각 거리는 대나무 잎이 스치는 소리는 머리가 삐쭉삐쭉 설 지경이었다. 그래서 걷는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향상 뛰어다니는 수밖에 없었는데 한 가지 곤란한 점은 냄비에 음식물을 담아주며 ‘갖다 주고 오너라! “ 하실 때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무언가를 손에 들었을 때는 노래를 크게 부르며 지나가는 것이었는데 그때마다 그 할머니는 ’ 노래도 잘하네 ‘라고 칭찬을 해 주시곤 했다.
어두워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태에서 물건을 전해주고 오면 매번 생각하던 일 중의 하나는 ‘저 할머니 집에도 전기가 들어오면 얼마나 좋을 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전기가 들어온다면 분명 외등을 켜 놓을 테고 그러면 대나무 길이 무서워 달릴 필요도 없을뿐더러 못 부르는 노래도 부르지 않아도 될 일인데 말이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어느 날이었다. 밤 8시가 넘어 사방은 컴컴한데 할머니께서 ‘이 옷감을 가져 다 주고 내일 아침까지 바느질을 좀 해달라고 해라 “하시며 한 보따리 보자기에 사 주셨다. 어림잡아도 옷이 5,6벌을 돼 보였다. 순간 앞이 캄캄했다. 주위도 물론 캄캄했다.
”할머니 내일 가면 안 돼요 “라고 말했지만 할머니는 내일 당장 갔다 줘야 할 곳 이 있으니 그냥 빨리 갔다 오라고 재촉을 하시곤 방문을 닫아 버렸다.
10살짜리 꼬마에게는 너무 가혹한(?) 심부름임에 틀림이 없었다.
노래를 2곡을 부르고서야 도착한 그 할머니 댁에는 여전히 깜깜해 앞을 분간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더구나 늦은 저녁을 드셨는지 부엌에서 나오는 할머니의 모습은 흡사 귀신같이 보여 보따리를 던지다시피 하고 뛰쳐나왔다.
허겁지겁 집에 도착해 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방안 불을 물론 책상의 스탠드 불까지 켜며 잠깐의 공포에서 벗어나려 했다.
순간 나의 뇌리를 스치는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다. 바로 어둠이었다. 옷보 다리를 던지다 시피하며 “내일 아침까지 할머니가 바느질 좀 해 달래요”하고 전한 말이 생각이 났다.
‘참 그 할머니 댁은 전기도 없어 칠흑같이 어두웠는데...’라고 생각이 들자 잠들 수가 없었다.
우리 할머니도 밤에는 그 집에 가본 적이 없으니 그 할머니 댁이 얼마나 어두운지 아실 리가 만무했다.
나는 벽장을 뒤져 초를 찾기 시작했다. 10여분 뒤져 찾아낸 것이 겨우 양초 2자루였다. 또다시 지옥보다 가기 싫은 그 할머니 댁으로 달려 깄다.
“ 할머니 우리 할머니가 초 챙기는 것을 깜박하셨데요”
그 할머니는 다음날 아침 네가 책가방을 들고 학교로 갈 즈음 집안으로 들어서며 “할머니 아침 잡수셨소. 바느질 다 해왔어요”라며 할머니 방으로 들어섰다.
나는 학교에 가자마자 당장 친구들을 소집했다. 다행히 내 친구들 집은 대부분 전기가 들어와 양초가 제사를 지낼 때 말고는 쓸 일이 없다고들 했다.
다음날 나는 양초를 책가방 가득 담아왔다.
“ 할머니 오늘은 뭐 심부름할 거 없어요”라는 말에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 이 돈 좀 전해주고 오느라”하셨다. 나는 양초 한 보따리를 짊어지고 할머니 댁으로 갔다. 할머니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이것이 웬 양초냐’ 반가워하시며 당장 한 개의 양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잠깐 기다리라며 부엌으로 달려가 단술(식혜)을 한 대접 가져오셨다.
그때서야 나는 그 할머니와 얼굴을 처음으로 찬찬히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뒤에는 심부름을 갈 때마다 촛불이 켜 있어 전과 같은 무서움은 없었다.
할머니는 말 그대로 젊은 할머니였다. 뒤에 듣기로는 이북이 고향이신데 혼자 월남해 전쟁 통에 남편을 만나 혼인을 했으나 전쟁 막바지에 남편이 실종되는 바람에 이곳을 떠나지도 못하고 우리 동네에 눌러살게 됐다고 했다.
그 뒤로 우리 할머니와 그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져 세상을 갑자기 떠나시는 날 까지도 함께 화투를 치시며 함께 지내셨으니 우리 할머니의 ‘절친’이었다.
세월이 흘러 내가 결혼을 하고 오래간만에 고향 동네를 딸과 함께 찾았을 때의 일이다. 동네 어귀에서 마주친 할머니는 서른이 넘은 나를 보고도 “아이코 우리 경엽이 많이 컸네”하신다.
나도 “할머니는 옛날 그대로이시네요 “하며 화답했다.
돌아오는 길에 딸아이는 “아빠 왜 아빠 보고 아직도 많이 컸다고 하셔? “
할머니의 기억 속에는 딸아이 만 한 ‘꼬마 경엽이’가 아직도 자리 잡고 있었다.
마을회관에 갑자기 정전이 일어났다. 다들 웅성웅성 댔지만 나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아니 할머니와 익숙한 어둠 속에서 옛일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더 좋았다.
할머니는 영정 속 사진에서 나와 마루에 촛불을 훤히 켜기 시작했다.
내가 친구들에게 수거해 가져다준 그 초들이었다. 게 중에는 몽당 초도 있었고 절에서나 쓰는 굵은 초도 있었다.
할머니는 가장 긴 초 끝에다가는 바람에 꺼지지 않도록 갓을 달아 건네주셨다.
”어두울 텐데 이렇게 하면 촛불이 집에 다 갈 때 가지 꺼지지는 않을 거야 “
또 어떤 장면에서는 방에서 뛰쳐나와 부엌으로 향하셨다.
할머니는 달콤하고 시원한 단술을 한 대접 들고 나와 “어두운데 심부름 오느라 고생했다 “며 어깨를 다독이셨다.
나와 할머니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잠시 후 불은 켜졌지만 촛불은 나와 할머니의 추억의 한 장면을 태우며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 이 글은 2018년 1월에 쓴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