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너 정체를 밝혀라
문학,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는 창(窓)
언제부터인가 문학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설렌다. 마치 사춘기 첫사랑의 대하 듯.
그 이유는 간단하다. 문학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고 또 만나기를 갈구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의 문학은 사람으로 치면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그런 시기이다.
사춘기 때 어떠했는가? 마음에 드는 이성 친구를 만나면 가슴이 설레고, 밤잠을 자지 못하고, 어떻게 좋아하는 마음을 전하며 또 어디서 데이트를 즐길 것인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고민이 온통 머리를 지배한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신학자들은 세상 모든 학문이 성경 즉 신학에서부터 나왔다고 한다. 현대 학문 중 가장 인기가 있다는 경영학의 마케팅은 전도하는 기법과 맥락이 일맥상통하고 홍보 또는 미디어학 역시 설교하고 전도하는 설득 커뮤니케이션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사랑은 문학의 기초가 되는 감정이며 이런 감정이 없다면 문학은 삭막한 넋두리이거나 말장난에 불과할 것이다. 반대로 사랑 대신 최소한 미움이나 역경, 고달픔 쯤은 하나 정도 있어야 문학에 근접할 수 있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 무덤덤한 감정이 존재할 때는 우리는 단순 말의 성찬이나 문학의 모방은 있을지 몰라도 자기만의 문학, 감동을 주는 문학을 기대하기란 힘들다.
그래서 어느 선배 문학인은 자신의 감정을 마인드 컨트롤하는데 열중하며 때로는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들과 밤새 토론하고, 낯선 사람과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수필은 시간적으로 과거의 일을 돌아보는 것
수필은 그 형식에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는 것과 같이 내가 살아온 과거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그것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고해성사와도 같다. 따라서 진솔함의 문학이며 반성의 문학이며 과거의 문학이다.
당연히 솔직하지 못하면,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면 좋은 수필이 나올 수 없다. 때로는 내 허물을 스스로 드러내는 일이라 용기도 필요하다.
물론 좋은 수필은 자신의 과거를 성찰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얻고 감동을 얻으면 금상첨화가 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 자신의 허물을 털어내지 못한 사람,
변명 늘어놓기를 좋아하는 사람, 남의 일을 마치 자기의 일인 양 삶을 표절하는 사람 등은 결코 수필을 쓸 수 없다. 그런 수필가를 본 적도 없다.
훌륭한 수필가는 과거를 반성 성찰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조그마한 마음의 창을 열어주는 그런 사람이다.
시는 시간적으로 현재의 삶을 노래하는 일
수필이 과거의 문학이라면 시는 현재의 문학이다. 아름다운 과거를 돌아보더라도 결국은 현재에 도달해야 하고 독자들에게 그 여운을 남기고 울림을 줘야 좋은 시가 된다. 이는 마치 범종의 맥놀이 현상과 같다. 언어와 감정이 만나고 운율과 상상의 미학이 어우러져야 시가 된다.
좋은 시로 오래도록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시 가운데는 어렵게 쓰인 시가 없다. 이런 점에서 최근 각종 문학상이나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를 보면 한숨이 난다. 자연을 자연답게 노래하지 못하고 사랑을 사랑답게 노래하지 못한 시를 마치 탁월한 시 인양 쓰고 또 그런 시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시는 쓰고 나서 스스로 낭송해 볼 필요가 있다. 의미가 쉽게 전달되면 좋은 시요 그렇지 못하면 당연히 나쁜 시이다.
소설은 시간적으로 미래를 기술하는 일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의 세계는 수필과는 달리 허구의 세계다. 이 허구의 세계는 과거의 일들을 기술할 때보다 미래의 일을 기술할 때 보다 선명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터무니없는 미래만을 추구할 수는 없다. 과거와 현재의 일들이 근간이 되고 그 바탕 위에 미래 허구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건축가는 설계도를 보고 좋은 집 여부를 판단하듯 나는 소설을 대할 때마다 뼈대를 살펴보곤 한다. 구성이 탄탄한지 여부는 바로 그 뼈대를 살펴보아야 가늠할 수 있다.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집이 부실하다고 평가받듯이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단계를 성실하게 거치려는 노력이 엿보여야 한다. 다소 순서가 뒤바뀌더라도 거칠 것은 거쳐야 한다. 장황한 상황 전개만 있고, 밋밋한 구성만 있다면 결코 흥미를 끌지 못한다.
문학은 일종의 비빔밥이다
문학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잘 버무리는 일이다. 그 비빔밥 안에 무엇을 첨가할 것인가는 각자의 살아온 배경과 정서, 장점, 경험 등을 어느 시기에 얼마나 보태느냐에 맛이 결정된다. 나의 경험으로는 수필과 시 소설 모두에서 우리가 쉽게 우를 범하는 일은 너무 어렵게 글을 쓰려는 자세에 있고 이를 경계해야 한다. 독자들을 맹목적으로 섬기고 무조건 의식할 필요는 없지만 문학도 독자들이 없이는 발전에 한계가 있으므로 수용자 입장에서의 글쓰기를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방언과 같은 시, 자화자찬만 늘어놓는 수필, 파격적이다 못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마는 소설, 이 같은 글들은 자신의 습작으로 머물러야지 세상에 발표되어서는 안 된다. 독자들을 위한 글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글이므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30년 가까이를 신문과 잡지의 기사를 쓰면서 글쓰기를 이어왔다. 그런데 이 신문기사는 결코 어려워서는 안 되며 어려울 필요가 없다.
“기사는 중학교만 졸업한 사람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써야 한다”는 것이 현재까지도 수습기자들에게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비단 이 말은 신문기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말에 대해 혹자는 문학과 신문기사는 다르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인정한다. 하지만 문학작품이라고 해서 전공논문일 필요는 없다.
옛 고승 중에는 어려운 경전을 읽는 것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외치면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설법하지 않았던가?
내가 쓴 글을 ‘읽다가 마는 독자’. ‘다 일고서도 무슨 말을 한 거야 반문하는 독자’, ‘시간낭비였다’고 혹평하는 독자, 이런 독자가 안 나오도록 배려해야 비용을 지출해 책을 사고 시간을 내 읽어 준 독자들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처럼‘모든 문학은 독자들로부터 나온다’라는 말을 한 번 곱씹어 봅시다!
* 이 글은 믄학광장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