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인의 흥이 내 몸에도 흐르는 것 일까?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유난히 ‘흥’이 많은 사람이 있다. 굳이 광대의 피를 물려받지 않았을 지라도 신명이 많은 사람은 금방 표시가 난다. 바로 내가 그 ‘흥’이 많은 사람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가장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장소는 역시 노래방이다. 나는 가수처럼 노래를 썩 잘 부르지는 못한다. 가끔씩 박자도 놓치고 음정도 놓친다. 하지만 나는 맛깔나게 노래를 부르려고 애를 쓴다. 노래방에서 함께 놀아 본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김 형은 노래를 참 맛있게 부른다”라고 한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빙그레 웃는다.
나의 이 감출 수 없는 ‘흥’은 외탁을 했다. 외할아버지가 그랬고 어머니가 그랬다. 반면 친가 쪽은 노래와 흥과는 거리가 멀다.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몰라도 요즘 시대에는 흥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주위 사람과 잘 어울릴 수 있고 이왕이면 신바람을 안겨 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수십 번을 생각해 보아도 외탁을 한 것이 무척 다행스럽다.
나의 ‘흥’은 군대생활을 하면서 우연히 발견됐다.
“김 상병, 자네 어깨 춤은 정말 일품이야. 자넨 정말 흥이 많아 보여”
내가 군 생활을 하던 1980년대 중반에는 병영 내에 군무 바람이 한창 불 때였다. 활기찬 군가도 좋지만 병영 생활을 신바람 나게 하고 덤으로 건강도 챙긴다는 의미에서 보급에 한창 열을 올릴 때다. 대대단위의 대회는 물론 여단, 군단 단위의 군무 경연 대회도 열렸다. 물론 그 포상은 휴가증이었으니 각 대대별로 대표 팀을 뽑아 맹연습을 시켰다.
30여 명의 대표를 뽑는 날, 감독을 맞은 선임하사는 단번에 내 어깨 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허슬 풍의 군무는 출전 팀 모두 실력이 비슷할 것으로 예상됐고 승패는 역시 민요풍의 군무에서 갈릴 판이었다. 바로 민요풍의 군무에서의 하이라이트는 덩실덩실 유연하게 추어야 하는 어깨 춤에 있었다.
나의 백만 불짜리 어깨 춤은 여덟 살 때로 거슬러 간다. 내가 사는 시골 동네에서는 초가을 초등학교 운동회에 맞춰 면민 잔치도 함께 열린다. 말 그대로 동네잔치다. 주로 봄철에는 체육대회가 가을철에는 놀이마당이 펼쳐진다.
그날도 예년처럼 오후가 되자 놀이마당이 펼쳐졌다.
솔밭 그늘에서 김밥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막 일어서려는 순간 운동장 한쪽에서는 농악대가 징과 꽹과리 소리를 내며 입장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공연을 예고하는 소리였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농악소리가 나는 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해 처음 맞는 운동회라 잘 몰랐지만 매년 이 시간이 동네 사람들이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했다.
겨울철 농한기에 마을별로 예선을 치러 최종 결선에 오른 두 팀만 이날 공연으로 우열을 가려왔던 것이 전통이라고 했다.
입장한 한 무리의 농악 팀이 서서히 자리를 잡고 본격적인 공연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공연이 시작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맨 앞줄에서 북을 치고 있는 분이 낮에 익은 분처럼 느껴졌다. 나는 공연이 진행될수록 바짝 앞으로 다가가 그분의 얼굴을 찬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분은 놀랍게도 바로 외할아버지였다. 외할아버지도 내가 알아본 것을 눈치채셨는지 더욱 신나게 북을 치고 심지어 그 허리춤에 찬 북을 자유자재로 돌리며 묘기를 부리셨다. 구경을 하던 마을 사람들은 외할아버지의 북치는 솜씨에 탄복을 하기 시작했고 매번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런데 그때 공연 속에 빠져들던 나도 어느새 그 농악대 사이로 들어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니 부끄럼도 없을 때이거니와 외할아버지가 신나게 공연을 하고 계신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공연 팀에 합류하게 됐다. 교회 유치부에서 배운 탈춤과 아리랑이 깜찍한 춤으로 재탄생해 큰 밑천이 됐다.
어린 내가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구경하던 동네 사람들도 한 둘씩 나오기 시작해 곧 온 동네 사람들이 춤을 추는, 말 그대로 축제의 장이 됐다.
훗날 외갓집에 갔을 때 난 외 할아버지에게 농악과 춤에 대해 여쭈어 볼 기회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청년이었을 때 경주에서 배웠지”
그랬다. 외할아버지는 경주가 고향이시다. 월성 박 씨이니 대대로 경주에서 살아오셨다.
경주에는 우리 민족의 정기와 문화가 흐르고 있는 곳이다. 지금의 우리 문화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민족문화라는 것이 생기고 자리 잡았으니 여느 곳과는 다른 무언가가 존재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청년시절을 보낸 할아버지는 경주의 신라문화제나 마을놀이마당 때 대표로 농악 팀을 꾸려 공연을 하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때의 이야기를 신이 나 해주셨다.
경주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하나 생각난다.
원효의 이야기인데 원효는 설총을 낳은 뒤에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지냈는데 어느 날 광대들이 갖고 노는 큰 박을 얻어서 수많은 부락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고 교화하였다고 한다. 이는 고승 원효가 자기를 낮추고 민중과 만나서 하나가 되는 과정을 노래와 춤의 흥으로 나타냈다는 말이다.
충남 공주 출신으로 신라 왕실의 국사가 된 경흥이 병이 들었을 때 한 여승이 찾아와서 열한 가지 탈을 쓰고 우습기 짝이 없는 춤을 추었는데 그 모습에 턱이 빠질 정도로 웃다가 경흥의 병이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탈춤을 추며 흥겹게 하여 근심으로 인해 든 병을 낫게 하였다는 것이다.
비단 흥은 내게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한민족에게는 ‘흥'이라는 피가 흐르고 있다 확신한다. 중국의 고문헌에도 우리 민족은 흰 옻을 입고 춤추기를 좋아한다고 기록돼 있지 않은가?
신라인들의 흥도 대단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이다.
오늘날 노래방 문화가 발달하고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여름이 지나면 곧 추석이다. 이번 추석에는 외할아버지 산소를 찾아 성묘를 해야겠다. 이번 성묫길에는 외할아버지가 좋아하시던 민요곡을 준비할 참이다. 모인 외갓집 식구들에게 그 옛날 외할아버지의 농악 놀던 모습을 전해드리고 이야기꽃을 피워 볼 참이다.
그리고 비록 외손자지만 나만큼 외할아버지의 흥을 물려받은 사람이 있는가도 찬찬히 살펴볼 참이다. 아마도 나만큼 흥이 많은 사람은 없을 듯하다.
멀리서 외할아버지가 치시던 북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어느새 내 어깨도 들썩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