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막내 의사 선생님

좋은 배필을 만나 골드미스를 면하게 되면 좋겠다

by 연오랑

“어머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나보다 더 깜짝 놀라 황망히 통장을 뒤로 감추는 여자분은 내가 투석치료를 받고있 병원의 과장 선생님이었다.

병원 안에서도 은행업무를 볼 수 있었지만 점심시간을 이용해 병원 식구들이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걸어서 10여분 거리의 은행을 택해 은행 업무를 보러 들린 것이었다.

번호표를 뽑아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던 나는 그 주치의 선생이 왜 은행에 들른 것인지를 대충 알 수 있었다. 바로 대출금의 일부와 이자를 갚기 위한 것이라는 것쯤은 창구직원과의 몇 마디 대화에서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대화 내용으로 보아 대출금이 모두 6천만 원쯤 됐고 그중 천여만원을 갚아 현재는 5천여만 원의 대출금이 남아 있는 듯 보였다. 주치의 선생은 주로 농민들을 조합원으로 해 운영되는 은행을 이용해 온 것으로 보아 아마도 시골 출신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갓 전문의 자격을 딴 그 주치의 선생은 내가 3년째 다니는 병원에 두 달 전쯤 새로 부임한 신장내과 전문의로 전문의로는 첫 직장이며 내가 첫 환자였다.

월초 월요일 아침이 이었다. 새로 온 주치의라며 침대에 누워있는 내게 스스로 자신을 소개하는 의사는 30대 초반의 앳된 여의사였다.

지난주까지 이 시간에 환자를 보던 여의사가 보이지 않고 새로운 얼굴의 여의사가 온 것을 보니 전 의사는 계약기간이 끝나 다른 병원으로 옮겨간 것이 틀림이 없어 보였다.

1년을 근무한 의사가 갑자기 온다 간다는 인사도 없이 떠나버린 것이 좀 섭섭했지만 금방 또 새로운 사람에게 적응을 하는 것이 환자들이다.

새로운 여의사는 무척 친절하게 환자를 대했다. 나이가 든 환자들이 엉뚱한 소리를 해도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일일이 응대를 해주는가 하면 상태가 조금 나은 환자들에게는 여러 가지 평소 주의사항을 꼼꼼히 설명해 주곤 했다.

투석실 30여 명의 오전반 환자들은 한결같이 칭찬 일색일 정도로 날이 갈수록 인기가 좋아졌다.

“아들이 있으면 며느리 삼았으면 좋겠는데..”하는 아주머니 환자들도 생겨났다.

어느 날 볼일을 보느라 평소보다 1시간가량이 가 투석시간에 늦은 적이 있었다. 다들 바늘을 꽂고 투석을 시작한 지 1시간여 지난 시각이라 환자나 의사, 간호사들 모두 한숨을 돌리고 있을 시간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비상계단을 이용해 투석실로 황급히 뛰어가는 와중에 층간 사이에 놓인 의자에서 누군가 전화통화를 하면서 훌쩍이는 것이 보였다.

새로 부임한 주치의 선생님이었다.

나는 바쁜 와중이었지만 뛰어 올라가면 통화를 방해할 것 같아 아래층 계단 의자에 앉아 딴전을 피우며 기다렸다.

3,4분여 계속된 통화에서 주치의 선생님의 부모님 중 누군가가 많이 아픈 것 같았다.

“ 전문의가 돼 이제 좀 형편이 나아져 효도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그렇게 많이 편찮으시면 어떻게 해...”

주치의 선생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으로 여겨 감정이 점점 더 격해지고 있었다.

“ 대출금은 걱정 마세요. 지난달부터 월급 대부분을 빚 갚는 데 사용하고 있으니 1년 정도면 끝이 나겠죠”

전화 상대방은 주치의의 대부분의 월급이 빚 갚는 데 사용되고 있는 현실에 무척 미안해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 30대 초반의 여자가 무슨 빚이 그리 많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론지었다. 아마도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가장 역할을 하느라 동생들의 학비며 부모님의 병원비, 또 자신의 학자금 대출금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 여 주치의는 그 이후에도 단 한 번도 어두운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런 걱정이 없는 듯 밝고 명랑한 모습으로 환자들을 대해 환자들도 엔도르핀이 솟아 밝아지게 만들었다.

어제 병실에 걸린 달력을 보니 그 주치의가 부임한 지 8개월째가 되는 날이었다. 아마도 4,5개월 뒤면 그 주치의 선생은 빚에서 해방돼 홀가분한 인생을 살날이 곧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내 마음이 다 밝아졌다.

그때가 되면 매일 청바지 차람에 흰 가운, 단발머리 스타일의 주치의 선생님은 여성스러운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최신 유행의 좋은 옻을 사 입고 예쁜 화장품도 갖추며 진정 골드미스로 살날이 분명 올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다.

더 바랄 것이 있다면 혹시 좋은 배필을 만나 골드미스를 면하게 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한편으로 나는 4,5개월 뒤 빚으로부터 해방되는 날을 어떻게 축하해줄까 고민하고 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므로 주위에 알릴 수도 없고...

비슷한 또래의 간호사에게 부탁을 해야 할 듯하다. 다른 어떤 핑계를 대며 파티 자리를 만들면 더 좋겠다.

주치의 선생이 걱정거리가 없고 기분 좋은 일만 있어야 결국 내게 그 혜택이 돌아온다고 생각하면 결국은 내가 좋아라고 하는 일이니 이상하게 생각할 일도 아니다.

병을 치료하는 동안 내게는 가족 이상으로 자주 그리고 가까이서 만나는 의료진의 사소한 행복도 내게는 큰 관심이 가는 일이다.

저 멀리 동료 의사들과 깔깔 거리며 지나가는 밝은 모습의 주치의 선생님이 보인다

“막내 주치의 선생님 힘내세요!”


* 이 글은 2015년 4월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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