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사람이 행복해야 내가, 우리 가족이 그 기운을 받아 행복해지는 법
내게는 남들이 보면 이상한 습관 하나가 있다. 아니 삶의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그것은 내가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 하면 이웃사람들은 일명 ‘기분파 해병대’라고 칭 했다. 또 한 가지 별명은 ‘오지랖 넓은 마을 이장’으로 통한다. 실제로 마을 이장은 하신 적이 없지만 동네일이라면 발 벗고 나선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는 해병대 상사 계급을 달고 계셨다. 30대 중반에 상사 계급을 달았으니 흔한 경우는 아니었다. 아마도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시고 계셨던 것 같다. 일명 폭파 전문가이자 교관이었다. 월남전이 한창이던 시절, 아버지는 파병에서도 항상 제외됐다. 훗날 해병대 친구들이 술자리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버지는 미군의 폭파 교본을 꿰뚫고 있는 몇 안 되는 공병 하사관이었다. 해병대 지휘관들은 아버지가 월남에 파병 갔다가 다치거나 전사라도 하시면 폭파 과목을 가르칠 교관이 없어진다는 것이 원인이었다. 공병이 하는 일 중요 가장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가 폭파라는 사실을 알면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아버지는 이웃들이 생일 날 만큼은 그 가족들보다 더 잘 기억하셨다.
“오늘이 00 아버지 생일날”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그날 퇴근 때에는 향상 맥주가 손에 들려있었다. 70년대 초, 당시 시골에서 맥주는 그리 흔히 구할 수 있는 술이 아니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부대 내 PX에서 많은 양은 아니지만 맥주를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맥주로 시작한 이웃집 아저씨들의 생일잔치는 그 후로도 몇 년간 꾸준히 계속됐다.
내가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아버지의 신상에도 변화가 생겼다. 18년이 넘는 동안의 군 생활을 마감하시겠다며 전역 신청을 하셨다. 전역을 하시게 된 동기도 지금 들으면 좀 이상하다.
병사들의 배식과정에서 지휘관과 갈등이 생기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전역을 결심하게 된 동기는 동기생들의 만류 과정에서 드러났다.
당시 해병대에서의 가장 현안은 병사들이 배불리 먹이는 일이었다. 향상 모자라는 식사량을 보다 못한 아버지가 지휘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바로 ‘자율 배식’이었다.
즉 병사들이 밥의 량을 배식이 아니라 먹고 싶은 만큼 들어서 먹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지휘관의 입장에서는 쌀이 모자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큰 모험일 뿐 아니라 (믿고 싶지는 않지만) 일부 쌀과 부식을 뒤로 빼돌리는 일을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지휘관과의 대립 과정에서 아버지는 당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양옥집 한 채를 담보로 내놓으셨다. 쌀이 많이 들어가 부식비 예산이 모자라게 되면 집을 팔아서라도 보충하겠다는 의미였다.
이 자율배식을 주장한 이면에는 “쌀과 부식이 모자라면 지휘관이라는 사람이 설마 뒤로 빼 돌리던 일을 멈추겠지” 하는 확신 때문이었다. 물론 규정대로 나온 쌀과 부식을 100% 사용할 경우 병사들이 배를 고 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율배식이 시작된 지 두어 달은 쌀과 부식이 모자랐다. 하지만 3개월째에 접어들자 병사들도 음식 욕심을 내기보다는 먹을 만큼만 담아가는 일이 정착돼 전과 같은 양의 식재료로도 매 끼니를 해결할 수 있게 됐다.
문제는 그 뒤에 일어났다. 이 자율배식이 아버지가 근무하던 공병대대뿐만 아니라 전 해병대에 부대로 확대됐고 몇 년 뒤에는 육군을 포함한 전 군에 확대됐다.
아버지는 이일로 지휘관들에게 미운털이 박히게 됐고 일종의 왕따를 당하셨다.
결국 택한 것은 전역이었다. 군 연금 혜택을 불과 1년 6개월여 남겨 놓고, 18년 6개월의 군생활을 마감했다.
난 철이든 한참 뒤 아버지에게 이런 질문 하나를 던진 적이 있다.
“아버지는 왜 가족들이 아닌 남에게 베푸는 일을 그렇게 좋아하세요”
그때 아버지의 대답은 “주변 사람이 행복해야 내가, 우리 가족이 그 기운을 받아 행복해지는 법이야”라고 것이었다.
아버지는 이후로도 80 평생을 사시는 동안 호주머니에 돈을 남겨 두는 일은 드물었다. ‘아버지의 돈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라는 우스갯소리마저 있을 정도였으니...
부전자전(父傳子傳),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낭비벽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집사람은 가끔씩 불만을 토로하긴 하지만, 난 나름대로 신념 하나가 있다.
“교회에 십일조를 하듯 내 수입의 10%는 내 주변 사람들을 위해 쓰자 ‘라는 주의다.
내가 교회에 나가지 않아 11조를 할 일이 없는 대신 내 주변 사람들을 위해 그만큼의 돈을 쓰면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행복해 지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내 주변 사람들이 행복하면, 덤으로 나도 그 기운을 받아 행복하게 될 것이 아닌가 말이다.
물론 지금 몇 년째 병치레를 하고 있는 나로서는 수입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기꺼이 호주머니를 열어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10% 지출을 마다하지 않는다.
조그마한 선물을 하기도 하고, 어려운 지인이 있으면 약간의 현금이나 상품권을 건네기도 한다. 난 술을 하지 못하지만 속상해하는 지인에게 술을 사기도 하고 식사를 대접하기도 한다. 비록 잘 알려진 기부단체에 공식적으로 기부를 하거나 이웃 돕기 성금을 내지는 못하지만 나 자신만의 기준을 정해 놓고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10% 기부는 나 자신을 위해서도 채찍질이 되고 있다. 나태하고 게을러서는 수입이 없게 되고 이 같은 일도 못하게 될 테니 말이다.
이제 9년째를 맞고 있는 혈액투석이 끝이 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뇌사자 장기기증 신청을 한지가 만 8년을 넘기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새로운 결심 하나를 하게 된다. 혹여 기증자가 나타나 신장을 기증받게 되고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하는 행운 온다면 그래서 지금보다는 더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하게 된다면 그 비율을 다시 조정하고 픈 일이 그것이다.
10%의 기부, 그것이 20%가 되고 30% 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
* 이 글은 2022년 7월에 쓴 글이며 문학광장 95호에 실린 글입니다.